게이코. 한자로 풀면 경자(敬子)가 되니, 우리는 그녀를 때론 '경자'라고도 부른다.
지난 달 말경에 게이코가 한국을 다녀갔다.
동경에서 약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몰타에서 영어를 배우는 동안 가까워졌다.
차분한 성격에 술도 잘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해
맥주와 와인을 끼고 살았던 우리와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술자리를 오래도록 지킬 줄 알고 때론 속내도 솔직하게 털어놓을 줄 아는 털털함이 있어
주변의 다른 한국 친구들로부터도 인기가 많았다.
지난 9월 말, 우리가 몰타를 떠난 2주 후에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던 게이코는
당시 엔화의 고공 행진으로 인한 금전적 횡재를 뿌리치지 못하고 체류를 더 연장해
지중해의 저렴한 맥주와 와인을 양껏 마시다 귀국해
환율의 직격탄을 맞고 고통에 신음하던 주위의 한국인들로부터
부러움을 한몸에 사기도 했다.
일본에 불어닥친 한류의 영향에 게이코도 결코 예외는 아니지만
다행히(?) 욘사마가 아닌 막걸리와 '찌지미', 김치를 좋아한다고 해서 우리를 어찌나 안심케 했는지..
한국에 오면 뭐가 젤 먹고싶냐고 물으니 뜸도 안들이고
"간장게장"
이라고 외친다.
간장게장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해서 어느 땐가 맛 볼 기회가 있었고 너무 맛있었단다.
해서 이왕 한국에 간다면 본토의 맛을 경험하고 싶다는게
그녀가 주저없이 간장게장을 외친 이유.
허나 한국에 오면 어디 먹을게 간장게장 뿐이겠나?
비싼 음식이 아니더라도 저렴하고 맛도 뛰어난 한국의 맛을 굳이 열거할 필요는 없다.
허나 3박 4일의 짧은 일정, 그나마도 우리랑 함께 다닐 시간은 고작 이틀뿐이어서
이것저것 미각의 즐거움을 맘껏 누리는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늦은 저녁,
공항에서 게이코를 픽업한 뒤 명동의 한 작은 호텔에 짐을 던져놓자마자 향한 곳은
종로 시사영어사 뒷편의 경북집.
24시간 운영하는 탓에 술을 찾아 불꺼진 도심을 헤매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공간이지만
사진의 전들은 오래전에 부쳐놓은 걸 데펴주는 정도여서 맛이 떨어진다.
갓 부쳐냈을 때의 향과 촉촉함은 대개 사라지고 퍽퍽한 질감만이 남았다.
그때그때 부쳐내는 수고로움이 만만치 않겠지만 고집스레 지켜낸다면
돈과 더불어 덕과 명성도 쌓을텐데..
그래도 늦은 밤의 술집다운 푸근함, 저렴한 가격(모듬전 7,000원)으로 아쉬우나마 찾게 되는 집.
예전 광화문에 출퇴근하던 시절 점심때 가끔 가던 장원삼계탕.
삼계탕보다는 1천원 더 비싼 약계탕을 주로 먹었었는데 게이코의 경계를 무시하고
'일단 먹어 봐' 하는 심정으로 약계탕 주문.
한약재의 구수함이 고급스럽게 느껴져 좋고
찬으로 나오는 뻘건 생마늘 짱아찌의 알싸함은 그 맛을 아는 이에게만 미소를 허락한다.
게이코가 그 맛을 알 턱이 없지만 그래도 본토 삼계탕의 맛에 미소를 잃지 않는다.
인삼주도 한 잔씩 곁들였으니 더 없이 즐거워야만 하는 시간.
허나 노회찬의 말마따나 민주화 이후 최대의 비극이 벌어진 이날이었으니,
TV를 곁눈질 해가며 인삼주잔을 비웠다.
같은 날 저녁, 게이코가 노래를 부르던 바로 그 간장게장이 펼쳐졌다.
사실 게이코를 위한 간장게장 이벤트를 꽤나 고민했었다.
인터넷으로 인천의 간장게장집을 샅샅이 뒤졌고
양 대비 싸게 먹을 방법으로 인터넷 쇼핑몰에서 간장게장을 주문해
만만한 식당에 싸들고 가 웃돈을 좀 얹어 양해를 구하고 그야말로 입이 쩔도록 먹여볼까도 생각했었다.
허나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 물리치고 결국 인사동의 신일집에 한 상 깔고 앉았다.
게장정식이 1인 2만원이니 이 동네서 이 가격에 먹기에 꽤나 저렴하다.
마침 남도음식을 내는 집이니 자잘한 찬꺼리에도 기대가 된다.
헌데 나온 것을 보니 짜잘한 크기는 그렇다 쳐도 기대한 꽃게장이 아니다.
꽃게 딱지에는 저 요상한 반점이 없는걸로 아는데 대체 무슨 게일까? 황게?
살짝 뒤통수를 맞았지만 제법 알찬 속과 푸짐함에 곧 생각을 고쳐먹고..
밥 위에 속살을 얹어 참기름을 한 두 방울 찍어 발라 입으로 넣으니
다음부턴 숟가락에 모터가 달린다.
꽃게건 황게건 게는 역시 게다.
게이코도 공기밥 추가.
다음 날,
자유로를 달려 임진각에서 망원경으로 북한의 실상을 보여준 뒤 일산으로 왔다.
우리가 일산에 살 때 세 손가락에 꼽던 맛집
일산칼국수.
닭을 푹 고은 육수에 바지락을 쏟아부어 절묘한 맛의 지점을 일궈낸 집.
여름엔 콩국수도 팔지만 역시 주력은 칼국수.
옵션은 닭을 달라고 하면 일일히 손으로 뜯어낸 닭살을 고명으로 푸짐하게 얹어주고
바지락을 달라고 하면 바지락을 푸짐하게 얹어주는 시스템, 허나 이날은 조금 빈약한 느낌..
1년 만에 찾았는데 가격도 6천원으로 올라 살짝 빈정.
그래도 맛의 포로로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렬은 여전히 길다.
15분을 기다려 입장, 한 사람앞에 한 그릇씩 먹는다.
삼계탕 먹을 때와 마찬가지로
저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냈는데 솔직한 이유를 물으니
"맛있어서"
라고.
칼국수는 게이코도 미처 예상치 못한 맛이었던지 이후 보내온 메일에서
칼국수에 대한 인상과 그리움이 잔뜩 뭍어났다.
같은 날 저녁.
홍대로 날아와서 야외 테이블에 한판 벌였다.
날씨 선선하고 저물어가는 휴일 마지막날이니 한가롭고 주변에 낮은 수풀이 병풍을 이루고
백열 조명아래 오손도손 고기 뒤집고 잔 기울이는 이웃들을 보니 더 없이 좋구나.
맥주 한 병으로 가볍게 입가심한 뒤 이후부턴 소주로 달렸다.
삼겹살 먹는 방법에 대해서도 가르쳐줬는데
1. 잔에 소주를 채운다.
2. 자기 앞에 잘 익은 삼겹살 한 점을 미리 대기시켜 놓는다.
3. 상대방과 술잔을 부딛친 뒤 단숨에 털어 넣는다. 쭉~!
4. 대기시켜 놓은 삼겹살을 입안에 넣어 알콜을 신속히 중화시킨다.
5. 1~4의 과정을 반복하며 취향에 따라 템포를 조절한다.
삼겹살을 외국인에게 표현할 때 그 어휘는 '바베큐'일 수 밖에 없는데
자꾸 생뚱맞다는 느낌이 지워지질 않는다.
그래서 세상에는 '바베큐'와 더불어 '코리안 바베큐'가 따로 있는건가?
사기충천해서 돌아간 게이코는
2차 한국여행을 위해 손님들에게 열심히 약을 팔고 있고
우리는 느긋하게 2차 미각리스트를 정리하고 있다.
광장시장의 녹두부침, 무교동의 북어국, 마포 을밀대와 동네 짜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