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냐'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3.26 오랫만에 한상 가득. 9
  2. 2009.02.09 주말 여행 6
  3. 2009.01.15 오랫만에 4
  4. 2008.11.09 볼로냐, 기차를 놓치다. Lost the Train in BOLOGNA 2


어제 강양이 볼로냐의 집을 둘러보고 딱 저녁먹을 시간에 돌아왔다. 베로나는 오후들어 살짝 쌀쌀했는데 볼로냐는 봄기운 완연에 햇살 짱짱해 속으로 '역시 볼로냐!'라는 탄성을 내내 지르며 돌아다녔다고. 특히 볼로냐에 머무는 동안 언제든 들락거릴 수 있는 EATLY(이틀리-지역생산물 판매 중심의 샾으로 식당, BAR, 서점을 갖춘 복합공간)의 발견으로 비행기 타기 전까지 볼로냐의 훌륭한 놀이터가 될 수 있겠다며 살짝 들떠있다. 이틀리.. 이름 참 잘 지었다. 2주간 머물 집은 건물 꼭대기층으로 작지만 독특한 구조고 햇살 만빵으로 받아내는 티테이블이 놓인 작은 발코니도 갖추고 있단다. 소파베드가 총 3개가 있어 3명이 지내는데 문제가 없다고 힘주어 말하는 주인 아줌마와 지금 현재 그집에 묵고 있는 40대 여자가 번갈아가며 말들을 쏟아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특히 지금 묵고 있는 여자가 영어를 좀 할 줄 알아 강양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고 시시콜콜 설명하고 했다는데 왜 아니겠나? 이탈리안데..

"여기 소파베드가 3개가 있지. 두 개를 붙여놓으니까 더불이 되고 남는 하나는 싱글이 되지. 난 기분에 따라서 하루는 더블, 하루는 싱글, 왔다갔다 해"

250GB 하드로 편집을 하기는 역시 무리다. 결국 어제 처음에 캡쳐받은 영상들 가운데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어정쩡한 영상들을 싹 지워내고 140GB로 확보된 빈 공간에 가편에서 걸러진 OK장면 위주로 다시 캡쳐를 받았다.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둥둥 떠다니던 이야기와 이미지들이 그제서야 좀 걷히고 하나씩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이 탄력을 쭉 이어가야 한다. 볼로냐로 떠나기 전까지 달려!!

집보느라, 캡쳐받느라 애쓴 두 입맛을 위해 남은 생선을 요리했다. 현재 물 오르고 있는(^^) 김군 솜씨에 있어 한식부분 최강의 생선요리는 생강푼 간장에 절여 구운 흑도미와 소금절인 고등어를 고춧가루 살짝 뿌려 찜기에 쪄내는 자반찜이지만 레몬 한 망태가 냉장고에 굴러다니고 있으니 오늘은 흑도미 구이다. 요리방법은 간단하지만 이게 오븐이 있어야 제맛이 난다. 특히 오븐이 있으면 맛에 있어 일타쌍피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데 조림에선 밥반찬으로 그만인 무를 얻을 수 있고 구이에선 고소한 생선을 얻을 수 있기 때문. 무 하나 보고 조림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나?

먼저 생선과 무가 잠길 정도로 자작하게 물을 붇고 간장을 짭짤할 정도로 섞은 뒤 다시마, 마늘, 양파, 생강조금, 후추, 청주(없으면 소주, 그것도 없으면 말고)를 뿌려넣고 재워둔다. 여기서 맛의 포인트는 생강으로 요리할 때 간장 품에서 피어오르는 생강향은 곧바로 술을 찾게 되니 주의할 것.

한 30분 끓이면 생선이 익고 국물에도 맛이 배고 무도 절반 정도 익는다. 이때 생선만 부서지지 않게 따로 낸 뒤 곧바로 달궈진 오븐에 투입. (철망에 기름 살짝 바르고 생선을 얹어 구어야 나중에 들러붙지 않더라는) 조림국물은 계속 끓이면서 무를 익혀주면 되고 이때 한 국자 정도 국물을 따로 건져내 자글자글 구워지는 생선살에 뿌려주면 더욱 좋다. 15분~20분 정도면 생선껍질이 바삭하게 익어질 정도로 익으니 꺼내서 접시에 담고 레몬을 취향대로 잘라 장식하면 그만. 파슬리를 생선 위에 뿌려도 좋다.

바삭한 껍질과 촉촉한 살점은 젓가락질을 즐겁게 하고 포실한 살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따라 올라오는 생강향은 고급 일식집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엔 청주나 사케, 화이트와인이 벗이다. 생선 한 면은 그렇게 살을 발라먹은 뒤 생선을 뒤집기 전에 먼저 작은 종지그릇에 조림국물을 한 국자 떠넣는다. 그리고 레몬 한 조각 짜넣고 파슬리, 혹은 고수를 살짝 다져 넣어 젓가락으로 휙 섞어주면 맛의 여정은 순식간에 일본에서 태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생선 한 점 떠서 이 소스에 적셔 먹으면 또 다른 마력을 느낄 수 있으니.. 허허 술 더 사와야겠네.

저 가운데 초점맞은 곳이 애간장을 태운다.


김을 넣은 계란말이.


무 조림. 앞에 보이는 흰 채소는 이탈리아에서 생선요리에 종종 곁들어 먹는 것으로 이름은 모르겠고 맛은 쓴데 무와 양파로 달달해진 국물이 저놈으로 인해 다시 써졌다. 허나 그것대로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우리식 김치, 양배추 무침


밥짓는 실력은 이제 고수. 쫀쫀하다.


 이탈리아에서 즐기는 소박한 가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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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시작해 월요일에 끝나는 짧은 여행. 내용은 이랬다. 우선 토요일 아침일찍 피렌체로 이동해 숙소에 짐 던져넣고 끼안띠의 판자노 동네로 가는 버스를 탔다. 1시간여를 달려 도착, 그곳에서 200년째 대를 이어 운영되고 있는 정육점을 방문했다. 주인의 이름은 다리오 체키니. 영미권에는 이미 각종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람으로 한낮 고기를 정형하고 판매하는 정육점 주인이지만 전통에 대한 고집과 고기에 대한 독특한 철학으로 오늘날 몹쓸 고기를 만들어내고 그걸 싸다는 이유로 마구잡이로 소비하는 이들에게 이런저런 경고와 고민을 던져주고 있는 인물. 광우병 소고기로 몇 번씩 파동을 겪는 나라의 사람들이 그에게 갖는 관심은 비상할 수 밖에 없다. 그를 만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카메라를 담는데 어떤 문제는 없을지를 알아봤고 다리오도 적극적이어서 현재까진 큰 문제는 없지만 통역문제가 매끄럽게 풀릴지 그게 좀 문제다. 이 동네에 잠시 거주하며 그 정육점을 밀착해볼까 생각도 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다시 다리오에게 문의를 해볼 생각. 그는 정육점만이 아니라 같은 곳에서 식당도 함께 운영하는데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의 방문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식사를 했다. 하루는 공짜로, 하루는 정당하게 값을 지불하고. 고기요리의 다양한 변주를 경험했고 배가 터지기 직전의 고통을 또 다시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어제 판자노를 오후 늦게 출발해 피렌체를 거쳐 볼로냐에 왔다. 김군이 현재까진 분위기나 풍광이나 여러모로 이탈리아에서 제일 멋진 곳이라고 생각하는 곳. 이곳의 한 작은 프랑스풍 식당에서 이탈리아 오너쉐프의 두터운 신뢰속에 2년째 요리를 하고 있는 최군을 만나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 일요일과 월요일은 식당이 쉰다하니 홀가분했다. 주인이 최군에게 식당 열쇠를 줬고 우리와 함께 마시라며 선물로 줬다는 스푸만테 한 병을 까는 것으로 시작, 이후 3병의 와인을 더 마시며 새벽 4시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입이 심심할 때 마다 틈틈이 간편한 요리를 제공해 전에 없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는데 작년 유럽 공연투어를 하던 REM, 이탈리아의 유명 가수, 볼로냐 시장과 페라리 회장의 딸이 와서 즐기고 그리고 한 때 예약했다가 피자가 먹고 싶다는 변덕으로 방문을 취소했던 패리스 힐튼이 왔다면 먹었을 몇 가지를 대접받았다. 특히 하나에 4.5유로를 받고 내놓는다는 프랑스 어디어디산 석화와 푸와그라는 최군이 약간의 만용을 섞어 우리에게 대접한 음식. 식당, 그리고 요리와 관련한 재미난 이야기로 밤새 얘기꽃을 피웠는데 가장 압권은 이 대목. 최군이 나름 실력을 인정받고 자신만의 솜씨로 또르뗄리니를 처음으로 내놓던 날, 이를 먹은 독일인 손님이 최군과 함께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던 주인을 불러 "이건 전자렌지 음식이지 식당 음식이 아니다"라고 항의했단다. 주인은 그의 접시에 담긴 또르뗄리니를 그 손님 앞에서 손으로 집어 먹은 뒤 맛있다는 이탈리아식 특유의 제스춰를 취하곤 "우리 주방에 전자렌지가 있는지 어디 찾아봐라, 이 또르뗄리니는 이탈리아에서 최고로 맛있는 또르뗄리니다"라고 소리치고는 손님을 내쫓았단다. 한 순간 하늘이 파랗게 보였던 최군은 되려 주인으로부터 위로를 받았고 그날 엄청 열심히 일했다고.. 식당은 올해 초 발간된 이탈리아의 감베로 로쏘(이탈리아의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볼로냐 최우수 식당(1위)으로 선정됐고 볼로냐 역에서 택시를 타고 식당 이름을 대면 택시는 두 말없이 그 앞에 정확히 내려준다. 우리는 조만간 이 식당에 저녁을 예약해 코스식을 먹어볼 작정이다. 오늘은 어제 폭음으로 나가떨어진 강양과 최군이 곧 일어나는 대로 너구리를 함께 끓여먹고 최군이 이끄는대로 볼로냐 시내 구경을 한 뒤 볼로냐에서 젤 맛있다는 피자집에서 피자를 먹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올 계획. 
Posted by dalgonaa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 서비스는 USB모뎀이다. 손가락만한 이놈을 가게에서 구입해 금액을 충전하고 컴에 꽂아 그만큼 사용하면 되는 것. 단기사용자 입장에서 쓰기 좋고 무선이다보니 이곳저곳 다니며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근데 이게 아주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는데 가령 10유로치를 충전해 사용할 경우 금액에 상관없이 한 달 안에 모두 사용해야 한다. 금액이 남아도 한달 후면 사용이 끝나고 한달 안에 금액을 모두 사용하면 당연히 사용이 끝난다. 근데 더욱 황당한건 만약 보름만에 사용을 다 해서 다시 충전을 해도 남은 보름을 기다려 한달을 지나야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걸 모르고 그냥 25유로라는 거금을 충전했는데 아직 한 달이 안채워져 사용을 못하고 있는 중이다. 정액에다가 정기가 이상하게 결합된 사용제도. 이 현실에 좌절하며 지금 유일하게 무선인터넷 서비스를 해주는 동네의 어느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이렇게 몇 자 적고 있다. 기간이 갱신되는 한 달이 바로 내일인 15일이다. 근데 앞서 충전한 25유로가 모뎀 칩에 고스란히 남아있을지 의문이다. 아무튼 이 글을 읽으며 도대체 무슨말인지 모르겠다고 짜증을 낸다면 그 심정의 딱 10배의 심정이 현재 우리 심정이라는 점만 알아주기 바란다. 만약 이탈리아가 전시상황이라면 이스라엘이 사용하는 미국제 무기를 빼앗아 먼저 이스라엘에 한 방 쏴주고 이탈리아 인터넷 서비스 회사에도 한 방 날리고 싶은 심정이다.

최근의 간단한 근황. 지난 주 가까운 아씨지를 다녀왔다. 날씨도 좋았고 동네도 근사했다. 성당 몇 개 둘러보면 되겠지 하고 얕잡아 봤는데 오후 1시부터 돌아다니기 시작해 이제 한 곳 봤다 싶었는데 어느새 4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기차시간을 알아보니 5시 기차를 타지 않으면 7시 기차를 타야하는 상황. 아씨지를 넉넉히 둘러보려면 하루는 꼬박 필요하겠더라. 붉은 빛을 받는 고성과 성당도 멋졌고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근사했고 기념품 판매에 혈안(?)이 된 수사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옆집, 그러니까 우리집과 같은 층에 있는 작은 방에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다는 이탈리아 '애송이'가 하나 입주했다. 이름은 네스뜨로. 키는 김군보다 조금 작고 얼굴은 서글서글하니 착하게 생겼는데 역시 주변으로부터 착하다는 칭송을 받는 우리와 발코니를 놓고 뜻하지 않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앞서 소개한 바 있듯이 멋진 풍광을 제공하는 이 발코니가 알고보니 우리집과 바로 네스뜨로의 집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었던 것. 근데 심각한 문제는 네스뜨로의 침실이 발코니에 나서는 순간 모두 엿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집주인(우리집 주인이기도 하다)이 우리가 발코니로 나서는 입구쪽에 창살을 설치했다는 점이다. 빨랫줄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다지만 발코니 끝에 서서 감상했던 풍광을 이제는 반쪽밖에는 볼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한 마디로 꼭지가 돌아버린 상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에 이어 우리에겐 두 번째로 경악스러운 사건이다. 의연하게 대처하는 생각에 친선우호적인 분위기속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여차저차 이야기가 오간끝에 창살을 좀 더 후퇴시킨다는 것으로 잠정 합의를 봤다. 그래도 발코니 끝에서 풍광을 즐길 수는 없는 상황.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후일을 도모키로 했다. 봄에 한국에 들어갔다가 다시 이 집으로 복귀하게 된다면 그때는 네스뜨로를 좋은 말로 구워 삶아서 저 창살을 없앨 생각이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적을 이길 수 없다면 적은 내편으로 만들어버리면 된다.

요며칠 날씨가 포근하다. 조만간 토스카나의 한 마을을 방문할 예정이다. 취재때문인데 만약 그곳에서 만난 어떤 인물이 충분히 얘기꺼리가 되고 그가 협조적이라면 그 마을에서 적어도 1주일 가량 머물며 카메라를 돌릴 생각이다. 그리고 볼로냐의 한 유서깊은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정열넘치는 한국청년이 있다고 하는데 그 친구도 한 번 만나러 볼로냐를 방문할 계획이다. 김군은 이탈리아 모든 곳이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특히 볼로냐가 마음에 와닿는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적당히 붐비고 적당히 지저분하고 적당히 큰 도시. 특히 찌를듯이 솟은 타워를 보는 순간 허를 찔리는 느낌이 들 수 밖에 없는데 시에나의 타워도 멋지지만 볼로냐만큼은 아니다. 볼로냐만의 고집스런 긍지 하나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며칠 전 뻬루자에 공부하러 온 외대 학생들을 집을 초대해 함께 저녁을 먹었다. '먹었다' 보다는 '먹였다'가 더 적합한 표현일 듯 싶은데 이탈리아 온 지 1주일 밖에 안된 탓에 그간 적응도 못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는 말을 듣고 어찌나 가엽고 애처롭던지.. 마침 강양의 생일날이기도 해서 파스타와 리조또로 허기와 외로움을 단박에 날려주었다. 강양 몫이 좀 줄어들긴 했지만 먹는 즐거움을 여럿이 만끽했다는 것으로 마음만은 푸짐해졌다. 오늘 지난 번에 미처 시도하지 못했던 돼지고기 토마토 조림 스테이크를 시도했는데 조금만 더 보완하면 메뉴로 올려도 손색이 없겠다는 평가를 강양과 며칠 째 우리집에서 머물고 있는 몰타 플랫메이트 지희로부터 받아냈다. 노파심에 말해두지만 지금 하는 요리들은 사실 호기심의 수준일 뿐 당장 식당을 염두해두고 하는 요리는 아니다. 진짜는 좀 더 후다. ㅋㅋ 그나저나 이제 불혹이라니..




Posted by dalgonaa
이딸리아 Italia 300908~2008. 11. 9. 20:21

1박2일의 PARMA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그저께 밤에 돌아왔다. 어제는 그 피곤함 때문에 아침에 성당에서 마련한 이탈리아 수업도 빼먹고 꼼짝없이 집에만 머물렀다. 무사히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도착은 했으나 그 여정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 파르마에서 만난 노양의 극진한 환대에는 그녀가 우리를 위해 배터지도록 선보인 요리와 그녀에겐 이젠 필요없어진 전기장판과 한국산 먹거리들, 그리고 볼로냐 발 베로나 행 열차티켓도 포함돼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노양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

다음날 아침 11시, 귀국짐을 이끌고 밀라노행 기차를 타야하는 그녀와 함께 집을 나와 파르마역에서 작별인사를 나눈 뒤 우리도 기차에 올랐다. 행선지는 베로나가 아닌 볼로냐. 파르마에서 베로나로 직행하는 기차는 없고 아랫동네인 모데나까지 좀 더 내려가 갈아탄 뒤 다시 베로나로 올라가는 시스템인지라 이왕 그렇다면 좀 더 아랫쪽인 볼로냐까지 내려가 거기서 노양이 우리에게 선물로 준 티켓으로 올라가 경비를 다소나마 줄이자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혹시 환승시간이 좀 남는다면 볼로냐를 잠깐 둘러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이탈리아 북부의 정중앙이라는 지리적 위치가 만들어낸 독특한 환경은 먹거리에도 영향을 끼쳐 이곳만의 독특한 식문화를 가꿔가고 있을꺼라는 근거없는 기대도 볼로냐 행을 거든 배경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볼로냐에 도착해보니 다음 베로나행 기차까지 주어진 시간은 고작 30분. 이왕 왔는데 역 밖까지는 나가보자해서 길을 건너 웬 길거리 중고책 좌판이 크게 열렸길래 그 구경을 잠깐 하고 다시 역으로 돌아왔다. 사실 앞서 파르마에서 볼로냐로 올 때 기차가 이미 30분을 연착해 미리 나와있던 시간 30분을 더해 1시간을 꼼짝없이 서서 대기해야 했던 경험이 끔찍했던지라 열차 출발 몇 분을 남겨놓고 역으로 돌아온 거였는데 베로나로 떠나는 기차가 있어야 할 3번 플랫폼에는 베네치아 행 기차가 버티고 있는게 아닌가?

우리 기차가 1시 48분 기차인데 베네치아 행이 46분 출발이라면 벌써 떠났을리는 없고, 그렇다고 2분 간격으로 같은 자리에서 열차가 떠난다는 것이 어째 논리적으로 가능해 보이지 않고 전광판을 보니 48분 베로나행 열차가 곧 출발한다고 경고등이 깜빡거리고 있고.. 뭔가 큰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사람들을 붙잡고 진상파악에 나섰지만 마음속은 '아뿔싸, 늦었다'!는 직감이 전해졌다.

진상은 이랬다. 볼로냐가 내륙의 중앙이다보니 나름 교통의 요지여서 한 자리에 중앙역과 서부역이 함께 있는 시스템이었던 것. '3W'라는 표시를 마냥 3번 플랫폼이라고만 판단했던 우리의 불찰이었다. 그게 '서'(West)의 사인이었을 줄이야.. 겨우 길을 확인한 뒤 전력질주로 지하도를 거쳐 서부역에 도착했으나 기차는 이미 떠나고 플랫폼은 쓸쓸한 바람에 휴지조각만 뒹굴고 있었다. 아.. 그 허망함이란.. (그 망할 연착은 이럴 땐 또 없단 말인지..)

다음 기차를 찾아보니 저녁 6시 37분이란다. 거진 5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하는 상황. 이왕 이렇게 된거 볼로냐 시내 구경이나 하자고 위로하지만 짐도 만만찮았고 파르마의 노양 집을 나설 때 어차피 기차만 갈아타면서 곧바로 집으로 갈테니 개인위생정비는 집에가서나 하자고 생각해 간단히 세수만 마친 덕에 몰골이 다소 추레한 상태였으니 이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게 아니었다.


>> 앞서 사진에서 봤듯 30분 사이에 책도 구경하고 피자집서 피자도 한 조각 사먹고.. 그 사이 기차는 떠나고.. 


허나 어쩌겠나? 등 떠밀리듯이 거리로 나설 수 밖에는.. 볼로냐에 대한 간단한 인상기로 마치자. 두터운 구름과 스산한 바람이 허망한 우리의 가슴속을 파고들었지만 중앙 거리의 넘쳐나는 인파는 곧 우리의 시선과 신경을 사로잡았다. 회랑식의 길고 긴 거리(결코 비 맞을 일 없는 이런 식의 길은 주변의 골목까지도 이어지며 그때문에 길은 전반적으로 어둡다. 그런 분위기 탓에 인적없는 골목에선 오랜 시간의 자취를 더듬기에 안성마춤이다), 오른쪽으로는 자잘한 상점들이 쇼윈도를 밝히고 있고 왼쪽은 어설픈 좌판과 거리 공연가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행인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오가는 사람을 피해 걷느라 사색에 젖기 힘든 것이 다소 불편했지만 거의 1km에 이르는 길이는 끊어지는 필름처럼 길 위의 단상들을 겨우겨우 연결시켜 줬다.

베로나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알콩달콩(?) 사랑얘기가 쓰어진 무대였던 만큼 현대에 이른 모습은 그 명성에 힘입은 관광으로 부를 축적한 관광객을 위한 도시같은 느낌, 이를테면 '보여지기 위한' 도시로써 애쓰는 느낌이라면 볼로냐는 시끄럽고 냄새나고 어수선한 것이 오히려 이게 사람사는 곳 같다는 편안함을 줬다. 파르마도 부분적으로나마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규모면에선 역시 볼로냐가 한 수 위다. 파르마 집값이 싸다면 옮길 용의가 있다는 얘기를 노양과 주고받았지만 볼로냐도 싸다면 아마 볼로냐를 선택할 것 같다는..^^ 그런 볼로냐를 방문하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 노양에게 다시 한 번 감사. 그녀의 진수성찬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역시 곧 정리해 올려야겠다.


>> 볼로냐 역 앞 횡단보도. 길거리 책좌판 광장으로 가는 사이에 찍은 것으로 이후 정작 볼로냐 시내 구경에 나섰을 때는 카메라 밧데리가 소진돼 시내 사진이 없다. 다시 방문하겠다는 의지를 다지지만 과연 저 길에 다시 설 수 있을까?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