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9.04.15 마지막 환대 7
  2. 2009.02.22 등장인물 6
  3. 2009.02.21 입이 호사로운 볼로냐 생활 3
  4. 2009.02.20 볼로냐, 카메라가 돈다. 2
  5. 2008.07.25 문이 잠기다


작은 기념품을 선물하기 위해 니코의 식당에 들렀다. 니코는 볼로냐에서만 3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해오고 있는 볼로냐 토박이 요리사다. 지금은 주방에서 은퇴해 가게 운영에만 전념하고 있고 그의 딸 에리카가 소믈리에로 아버지와 함께 가게 운영을 주도해 가고 있다. 이들 부녀가 운영하는 식당 바띠베코는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유행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하지 않은 식당이지만 그 속도가 빠르지는 않다. 아버지는 전통을 중시하는 가운데 조심해서 변화를 받아들이는 입장이라면 딸인 에리카는 마르코 파디가처럼 과감하게, 또는 파격적인 요리로 나서야 한다고 얘기하는 입장이다. 지난 번 니코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뒤 니코는 우리에게 요리와 관련해 참 많은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 가운데 인상적인 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다.
 
"볼로냐는 바로 마르코 같은 요리사가 필요했다. 그는 이탈리아 사람이지만 프랑스에서 공부를 했고 프랑스 요리를 한다. 이는 당연한거다. 다른 요리를 선보이는 실력있는 요리사가 볼로냐는 꼭 필요했는데 마르코가 그 역할을 한거다. 우리는 마르코를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내가 마르코처럼 해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탈리아 요리사고 이탈리아 요리를 하면 되는거다. 근데 내 딸은 매일 마르코 마르코 하며 노래를 부른다"


부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전선이 분명 있을텐데 요 얘기를 좀 더 파고들면 재미도 있고 나름 깊은 메시지도 건져질게 틀림없다. 사실 이들 부녀의 대립(?)은 비단 바띠베코만의 고민이 아니라 이탈리아 대부분의 식당, 대부분의 요리사들이 겪는 고민이 아닐까 싶다. 일전에 마르코는 우리에게 말하길 "너무 많은 전통이 있다. 그게 숙제고 고민이다"라고 이탈리아 요리사로서 갖는 속내를 털어놨다. 오늘날 서양요리의 중심축이 프랑스와 이탈리아라고 많은 이들이 얘기하지만 정작 실질적 인기와 부, 유행을 이끌어가는 것은 영국과 미국의 레스토랑이라는 말도 마르코는 덧붙였다.

전통에 대해선 조금 다른 입장의 니코지만 그도 결국엔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것이 "30년 전에는 유럽 어디를 가든 볼로냐에서 왔다고 하면 '오~ 볼로냐! 요리의 도시!'라며 반겨줬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어디에 있는 도시냐고 되묻는다" 라며 달라진 세상을 쓸쓸히 푸념했다. 고루한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안 전통이라곤 없는 영미권이 요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가고 있다는 얘기니 다소 놀라우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제이미 올리버, 램지 고든은 요리에 관해서라면 누구나 저주하는 영국 출신이다. 여기에 알랭 듀카스, 기 사보이, 노부 마츠히사는 프랑스와 일본인이다. 세계적 유행을 선도하는 이탈리아 요리사를 딱히 꼽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물론 우리도 여기 와서야 알았지만 이탈리아 요리의 현대적인 기틀을 마련했다고 추앙받는 괄띠에르 마르께지 등의 헌신적인 요리사가 없는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는 아직도 전통과 내일 사이에서 고민, 어쩌면 방황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째 남 얘기가 아니네 라는 생각이..


볼로냐는 에밀리아 로마냐주의 주도. 이곳을 대표하는 음식이자 이탈리아 대표음식이기도 한 세 가지, 프로슈또, 모르따델라(흰 비계가 박힌 부드러운 소시지), 빠르미쟈노레냐노 치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 아쉽지만 곧 다음 기회를 벼르며 나서는 길이니 아쉬움은 접어두려고 한다. 암튼 점심시간에 바띠베코에 들렀고 그들에게 작은 기념품을 선물했다. 모두 반색을 한다. 점심을 얻어 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그냥 보낼 수 없다며 끝내 자리로 앉힌다. 결국 프로슈또와 볼로냐의 대표 요리 또르뗄리니를 얻어먹고 식당을 나섰다.



또르뗄리니는 치즈와 프로슈또를 갈아 소를 채운 작은 만두같은 요리로 이를 뜨끈한 쇠고기 육수에 담아 숟가락으로 육수와 함께 떠먹는 요리다. 국물은 갈비탕 국물과 거의 똑같다. 또르뗄리니는 작년에 빠르마에서 먹어보고 이번이 두 번째. 좀 아까 집주인 엘레나가 다녀갔다. 키를 전해줬고 작별인사를 나눴고 그녀는 작은 쨈 하나를 우리에게 선물했다. 생각지도 못한 점심환대에 선물까지 받아챙긴 하루. 마무리가 좋다. 내일 프랑크푸르트 공항만 잘 빠져나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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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변화는 다소 있겠지만 현재 비디오에 담겨지고 있는 인물들은 이렇다.


먼저 16살의 '애송이' 스테파노. 키 185의 그는 베네치아 인근의 마을에서 왔고 현재 요리 고등학교에서 공부중이며 두 달간 이곳 주방에서 현장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스파게티를 버터에 비벼먹는게 그의 특기이며 식사후엔 커피 한 잔, 그리고 담배 한 개피. 역시 어려서인지 볼 수록 귀여운 구석이 있다. 현재 선배들의 지도속에 안티파스토 담당.

페루 리마에서 온, 역시 스테파노와 마찬가지로 주방 실습중인 리카르도. 26살로 가에따노(최경준)와 동갑이며 어제가 그의 두 달간의 주방실습 마지막 날이었다. 지금은 북반구와 반대로 여름인 고향 페루로 돌아가 잠시 몸 좀 녹인 뒤 마르코의 추천장을 들고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한 주방으로 들어갈 예정이다. 어제까지 돌치(디저트) 담당.

베르가모(Bergamo : 밀라노 인근의 작은 도시) 출신인 수쉐프(부주방장) 엔리코. 다소 거칠고 우악스러운 베르가마스크(Bergamsk-베르가모 사람)들이지만 맡은 일은 끝까지 완수해낸다는 기질을 지녔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이탈리아가 이모양 이꼴인 것은 모두 다른 지역 이탈리아인들 때문'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데 이탈리아의 문제는 다른 지역의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올해로 9년째 마르코와 함께 일하고 있으며 레스토랑의 10% 지분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세꼰도(육류와 생선요리) 담당.

가에따노(본명 최경준). 2년째 마르코의 주방에서 일하고 있으며 쁘리모(파스타)를 담당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요리를 좋아해 소질만 믿고 쫓아온 끝에 이탈리아 볼로냐에까지 들어오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도 갈길이 멀다며 곧 일본으로 주방을 옮길 고민을 하고 있고 마르코와는 어느정도 얘기가 마무리된 상황. 한국적인 입맛과 아이디어가 이탈리아 주방에서 꽤 쓸모가 많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또르뗄리니를 담가먹는 육수에 무를 넣어 국물맛을 한층 시원하게 만든 것은 가에따노의 아이디어. 지금은 무의 질이 안좋아 넣지 않지만 곧 질좋은 무가 출하되면 육수에 꼭 넣어 끓인다고 한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호세. 레스토랑의 모든 접시와 잔의 세척은 그의 몫이다. 5년 전 마르코 레스토랑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부터 지금까지 함께하며 주방의 요리를 뒤에서 빛내고 있다. 일할 땐 무척 과묵하지만 가끔 요리사들에게 오가며 장난을 건다. 


삐에몬테에서 온 베로니카. 볼로냐 대학을 다니고 있으며 생활비 마련을 위해 까메리에레(웨이트레스)로 일하고 있다. 성실하고 마음이 후덕해서 주방 요리사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하다. 매일 출근.


밀라노에서 온 이레네. 역시 대학에서 공부중이며 베로니카와 더불어 홀을 담당하고 있다. 부자도시에서 와선지 깍쟁이같은 구석이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바쁜 금요일과 토요일에만 출근. (이외에 홀 담당하는 프랑스에서 온 '뭉그'가 있지만 사진을 미처 못찍었다)

엘렌. 마르코 파디가의 프랑스인 부인으로 바쁜 금요일, 토요일에는 베로니카, 이레네, 뭉그와 함께 홀을 커버한다. 식당을 프랑스적인 분위기로 연출시키는데는 그녀의 역할이 크다. 쌍둥이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담배를 한 대 칙 피워물고 힘차게 몰고 가는 전형적인 프랑스인.

마르코 파디가. 계산대에도 서고 테이블에서 주문도 받고 안티파스토, 쁘리모, 세꼰도, 돌체, 모든 영역을 넘나들며 레스토랑을 총지휘하는 전형적인 오너쉐프. TV에 나오기 좋아한다는데 비단 그만이 아니라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러지 싶다.

Posted by dalgonaa


볼로냐 두오모 맞은 편의 어느 길. 저 뒤로 두에또리(Due Torri-두 개의 탑)이 보인다.

볼로냐 삼일째, 숙소를 옮겼다. 하루 79유로(15만원)의 살인적인 가격을(사실 이탈리아, 또는 유럽 어딜가나 호텔은 이 가격 안팎이다)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 해서 볼로냐 도착 첫날, 레스토랑 사람들을 만난 뒤 오후에 길을 나서 좀 더 저렴하게 머물 호텔을 2시간 가량 찾아 헤맸고 결국 문열고 나서면 볼로냐의 상징이라 할 두에또리를 바로 코앞에 둔 위치에 하루 60유로짜리 호텔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레스토랑과도 걸어서 불과 10분이 안걸리는 가까운 거리다. 가정집을 소박한 호텔로 개조한 곳인데 호텔 한 켠에 주인이 거주하는 방이 있는 걸로 보아 가족이 운영하는 호텔인듯 싶다. 민박집같은 정서가 느껴져 좋고 무엇보다 무선인터넷이 공짜고 방이 넓다. 다만 60유로의 방은 화장실이 딸려있지 않아 복도에 있는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지만 슬쩍 둘러보니 투숙객이 거의 없는 듯 싶어 그냥 우리것처럼 쓰면 되지 싶다.


수쉐프(부주방장) 에리코가 '많은 편은 아니다'라는 말을 덧붙이며 주문표를 펼쳐보이고 있다.

취재 이틀째를 맞는 마르코 파가디 비스트로는 자정이면 문을 닫지만 손님이 밀려드는 금요일과 토요일의 경우 2시가 넘어서야 영업이 끝난다. 어제 금요일도 그랬다. 마르코의 프랑스인 부인과 주말에만 고용하는 웨이터가 가세했고 주방안은 밀려들어오는 주문을 쳐내느라 정신없이 움직였다. 주방은 이태리어와 영어, 프랑스어, 그리고 한국어가 뒤섞여 벅적대는 가운데 이태리 파스타, 프랑스 프와그라, 영국식 피쉬앤칩스와 일본식 초밥이 정확한 손맛과 타이밍으로 만들어져 홀로 분주하게 날라졌다. 몸으로 하는 모는 분야의 일이 그렇겠지만 요리사라는 직업도 어느정도 몸이 익숙해지면 그때분턴 리듬을 타고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주변 동료들과 손발을 맞추는 시간이 지나면 그때부턴 1개 대대의 주문이 들어와도 물 흐르듯한 리듬으로 모든 것을 감당해낼 수 있게 된다. 요리사로 가는 과정에서 대개 거치는 견습생의 시간이란 어쩌면 레시피나 기술은 둘째 문제고 바로 그런 리듬을 탈 수 있는 감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진하고 뜨끈한 육수에 담가 먹는 또르뗄리니.  

주방에서 이들과 섞여 있다보면 자연스레 이것저것 맛보게된다. 샴페인, 라비올리, 프와그라, 피시앤칩스, 디저트 등은 물론이고 이들과 함께 먹는 점심과 저녁은 그 자체로 값비싼 식사다. 점심은 쁘리미(파스타) 담당의 가에따노가 준비하고 저녁은 세꼰도(육류와 생선) 담당의 에리코가 준비하는데 어제는 사진에서 보는 것들이 등장. 간만의 촬영이 빡쎄서 힘들지만 맛의 지평을 넓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이니 호강이 아닐 수 없다.  

샤프란 리조또

사과쨈, 푸와그라, 감자튀김, 그리고 소금 살짝

종이 고깔에 담아내는 피시앤칩스. 소스는 토마토 베이스.

아르헨티나산 새우를 얹은 라비올리. 거품은.. 이름 까먹었음..

5리터 분량의 와인을 냄비 바닥이 비칠 정도의 양으로 졸여낸 소스.

어제 요리사들의 점심식사 리가또니.

어제의 저녁식사 숭어구이

점심식사 모습. 가에따노가 가장 자신있어 하고 좋아하는 파스타는 살시치아(갈을 고기로 속을 채운 일종의 소시지)가 들어간 파스타인데 이태리를 떠나게 되면 그 맛을 떨쳐버리기 힘들 것 같아 최근에 살시치아 장인을 만나 그 레피시를 익혔다고 한다. 그 비법은 아무에게도 안가르쳐줄꺼라는데 다만 자신의 미니홈피 방명록에 인사라도 남겨주는 사람에 한해서는 살짝 레시피를 알려주겠다고.. ㅋㅋ

Posted by dalgonaa

요 며칠 이탈리아가 꽝꽝 얼었다. 뻬루자야 늘 춥고 지금 와 있는 볼로냐도 적잖이 춥다. 일전에 잠깐 이야기했던 볼로냐 요리사 최군(이탈리아 이름-가에따노)에 관한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 어제 온 것. 오너쉐프인 마르코 파디가도 만났고 함께 주방에서 뒹구는 수쉐프 에리코와 스테이지(실습생) 생활을 경험하고 있는 페루의 리카르도와 베네치아의 밤비노('애송이'란 뜻. 16살) 스테파노도 만나 저녁 내내 주방에 함께 머물며 서로의 존재감을 익혔다. 일과를 마친 후엔 이들의 숙소로 몰려 올라가 가에따노가 끓여준 너구리를 먹고 이들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걱정과 달리 하룻만에 모두를 친숙해졌으니 다행이다. 볼로냐에는 약 10일간 머물면서 이들을 카메라에 담을 예정이고 이후 잠시 뻬루자로 돌아갔다가 3월 중순에 잠깐 2차 촬영을 할 예정이다. 역시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니 이야기꺼리가 풍성해지는 것 같은데 이를 과연 어떻게 엮어낼지를 놓고 한동안 머리를 싸매야 할 것 같다. 과연 좋은 내용이 나올지..  식당의 명성은 바로 이 주방에서 이뤄지는 셈인데 워낙에 비좁아 카메라를 돌리고 괜찮은 그림을 잡아내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점도 큰 고민의 하나.

마르코 파디가 비스트로는 프랑스에서 7년간 요리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마르코가 5년 전 오픈한 볼로냐의 레스토랑이다. 요리의 기본 정체성은 이탈리아 요리지만 맛을 위해서라면 어떤 국적의 요리라도 메뉴로 내놓을 수 있는 열린 사고를 가진 식당. 올해초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레스토랑 가이드북 감베로로쏘로부터 볼로냐 최우수 식당으로 선정됐고 마르코의 이름은 어느덧 구미의 몇몇 언론에도 알려졌으니 나름 세계적인 인사가 된 셈이다. 이곳에서 마르코와 함께 2년째 일하고 있는 가에따노를 중심으로 요리와 식당, 그의 동료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을 예정이고 볼로냐의 유서깊은 파스타는 덤이다.  이탈리아 주방에선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궁금하면.. 봄까지만 기다려달라 ^^.


맨 뒤로 프랑스에서 온 뭉그가 접시를 내가는 가운데 빨간 꽃 앞치마를 두른 오너쉐프 마르코, 그와 9년째 호흡을 맞추고 있는 에리코, 그리고 비니모자를 눌러쓰고 접시에 소스를 뿌리고 있는 가에따노의 모습.

가에따노의 전담분야는 바로 파스타.

당분간 인연을 갖게된 볼로냐, 인터넷도 연결이 되니 이곳 소식을 자주 전하겠다.

Posted by dalgonaa

징조는 있었다. 플랫의 막내가 입주한 후 그녀 혼자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려던 어느 날, 현관문 두 개의 열쇠 구멍 가운데 하나가 열리지 않아 2시간 가량을 문 앞에서 마냥 기다려야 했던 그 날이 바로 그랬다. 집에 돌아와 뒤늦게 그 이야기를 듣고 '쯧쯧.. 미숙한데서 온 문제였겠지..' 혀를 차며 속으로 막내를 구박을 했었다.

근데 어제, 저녁을 먹고 모처럼 저녁 산책 겸 인근 K-mart로 간장과 식초를 사러 나갔다 돌아와 문을 열려고 하니 그 때와 똑같이 문이 열리지 않는게 아닌가? 그때 바로 깨달았다. 막내의 미숙함이 아니었구나..

원인은 금새 파악됐다. 입주 당시부터 약간 덜그덕거렸던 문 손잡이의 잠금 장치가 문제였던 것. 안쪽에서만 잠그는 잠금장치가 비록 밖에서 잠그지 않아도 가끔 자기 스스로 허술하게 잠기는 문제가 있었던 것인데 그때 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겨오다 어제에 이르러 기어이 사고가 터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시간은 이미 9. 전화를 걸어 마땅히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마침 무슨 종교기념일인지 밖에서는 브라스밴드를 따라 사람들의 긴 행렬을 이루며 지나가고 있었다. '신이시여, 이 늦은 밤, 졸지에 집 없는 떠돌이가 된 우리들을 굽어 살피소서..'

하지만 구원의 전령은 없었다. 우리는 못미더운 신을 서둘러 지우고 앞집의 초인종을 눌러 도움을 요청했다. 문을 여는데 도움이 될 법한 도구가 있나 알아봤지만 이번 여름휴가를 즐기기 위해 독일에서 온, 3대로 구성된 가족들로부터 얻어낸 것은 버터 나이프가 전부. 자신이 직접 열어보겠다며 당차게 맨손으로 달려드는 할머니를 뒤에서 어린 손자가 물끄러미 지켜봤지만 열릴 턱이 없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거리를 떠들썩하게 했던 행렬은 이미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유난히 고요해진 그 시각, 플랫 식구 4명은 여전히 어두운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문 손잡이가 조금 더 벌어져 잠금 장치의 내부구조가 드러나긴 했지만 해결책은 그 좁은 틈 속에 어지럽게 얽혀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난해했고 버터 나이프는 덜그럭 덜그럭 같은 수고만 반복했다. 절망이 엄습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물러설 순 없었으니.. 이 순간, 우리에겐 3가지의 선택이 있었다.

첫 째는 현관 유리를 깨고 들어가는 것, 둘 째는 큰 망치를 구해 문 손잡이를 부숴버리는 것, 셋 째는 가장 위험한 것으로 마침 집이 3층 꼭대기 층이니 옥상으로 올라가 발코니 처마로 접근한 뒤 거기서 재주껏 발코니쪽으로 힘껏 뛰어 내리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 세가지 안을 놓고 잠시 토론이 오갔다. 가장 깔끔한 것은 발코니를 통해 들어가는 것이지만 세 가지 안 가운데 도박성이 가장 컸다. 도강에 실패할 경우.. 생각만해도 끔찍해 이는 곧바로 접었다.

유리를 깨고 들어가는 문제도 결국엔 이미 못쓰게 된 문 손잡이에 이어 유리문제도 해결해야 하는 숙제로 이어진다는 것이 문제였고 마지막으로 손잡이를 부술 망치를 이 늦은 시각에 어디서 구할지가 문제였다. 어느 것 하나 뾰족한 대안은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모두가 우려하고 기피하면서 감히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던 나머지 네 번째 안을 조용히 제안해 '의결'키로 했다. 그것은 각자 흩어져 하루 잘 곳을 찾아 들어간다는 것.

김군과 강양, 지희는 타군의 집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막내는 학원 친구의 집으로 들어가기로 하면서 늦은 밤, 1시간 넘게 이어진 현관문과의 씨름은 일단 막을 내렸다. 건물을 나와 길바닥에서 집을 올려다 보았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시쳇말로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그 기분을 뒤로 하고 터벅터벅 발길을 옮겼다.

다음 날. 8 타군네 집을 나와 가까운 철물점을 찾았다. 사정을 설명하자 친절한 철물점 주인은 우리에게 MIKE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넸다. 우리는 MIKE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꾸물거림 없이 전화를 받았고 주소를 되물은 뒤 15분 후에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우리는 살짝 들떴고 지희는 특히 더 그랬다. '반듯한' 모범생인 그녀는 수업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기대감만으로도 지난 밤의 낯선 불편함을 이미 잊은 듯 했다. 모두들 서둘러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 곧이어 마티즈 승용차 한 대가 도착했다. 알록달록 컬러와 귀엽게 형상화된 열쇠 그림으로 뒤덮인 마티즈는 마치 어린이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운전석에서 지희의 허벅지만한 팔뚝을 가진 사내가 내렸다. MIKE였다. 키는 작지만 우악스런 몸집의 그는 벌써 땀에 젖어 있었다. 그의 팔뚝에 새겨진 한문 문장의 문신을 본 곁눈질로 훔쳐본 지희는 전공인 일어를 통해 익힌 한문실력으로 그 뜻을 헤아려 봤지만 뜻이 엉망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마이크는 비싼 카메라가 튀어나올 법한 반짝이는 은색 금속 가방을 들고 올라왔다. 그리고 문제의 현관 앞에 섰다.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려본 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는 금속 가방에서 딱딱한 카드 같은 것을 꺼내 문틈 사이로 끼워넣기 시작했다. 김군은 눈치챘다. 잠금고리의 구조를 역이용하는 것으로 딱딱한 카드가 미끄러져 들어가면 문이 열리는 방식이라는 것을. 하지만 어쩐지 미덥지 못해 보였다.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MIKE 역시 같은 수고를 반복했고 땀도 더 많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우리 모두는 결코 내키지 않는 그의 패배를 직감했다. 결국 그 역시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우리를 돌아보며 양 어깨를 들썩하고 치켜세운 그는 '이건 마르코가 열어야 해요'라고 말했다.

마르코가 누구냐고 묻자 또 다른 열쇠공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의 이름과 전환번호를 알려주었다. 열쇠공이 자신보다 한 수 위로 인정하는 또 다른 열쇠공 마르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마이크와 달랐다.




>> 갑자기 졸음이 몰려온다. 재미없는 얘기를 가뜩이나 재미없게 써내려니 그럴 수 밖에.. 그냥 지워버릴까 생각하니 여기까지 적은 게 아깝다. 나중에 마저 정리키로 하고 우선 여기서 잠시 멈춰야겠다. 지난 밤, 타군네서 워낙 잠을 편히 못 잔 탓이다. 사진 하나 곁들인다. 고장난 좁은 자물통 틈에서 애꿎게 고생한 Butter Knife.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