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코'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1.03.15 일본 친구의 안부 1
  2. 2009.06.30 게이코의 미각여행 12
  3. 2009.03.18 이제 한 달. 2
  4. 2008.09.20 '경자'의 지중해식 카레라이스 2
카테고리 없음2011. 3. 15. 10:33
요즘엔 주방에 라디오를 틀어놓고 일을 한다.
음악을 듣고 디제이의 실없는 농담도 듣고 매 정시 전에
교통상황도 듣고 하다보면 이 좁은 주방에 갇혀 있는 것이 조금은
덜 답답하게 느껴진다.  
57분 교통방송에서 느닷없이 일본 지진얘기를 꺼낼때만 해도
여느때처럼 땅이 좀 흔들린 모양이군 하며 괘념치 않았다.
헌데 그게 그렇지 않았더라는..
그날 저녁 식당에 걸린 텔레비전을 보며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해서 어제는 일본친구 게이코에게 오랫만에 메일을 썼다.
이미 강양이 그녀의 안부를 나보다 앞선 메일로 확인했으나
아무래도 힘들 땐 보다 많은 사람들의 격려가 위로가 되지 않겠나?
아직 답장은 없지만 강양에게 보낸 답장에서
진정제를 몇 병 삼키며 위기를 보내고 있다 했다.
그녀는 도쿄에 거주하고 있다.


Posted by dalgonaa
한국 Korea 160409~2009. 6. 30. 12:15



게이코. 한자로 풀면 경자(敬子)가 되니, 우리는 그녀를 때론 '경자'라고도 부른다.
지난 달 말경에 게이코가 한국을 다녀갔다. 
동경에서 약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몰타에서 영어를 배우는 동안 가까워졌다. 

차분한 성격에 술도 잘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해 
맥주와 와인을 끼고 살았던 우리와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술자리를 오래도록 지킬 줄 알고 때론 속내도 솔직하게 털어놓을 줄 아는 털털함이 있어
주변의 다른 한국 친구들로부터도 인기가 많았다.

지난 9월 말, 우리가 몰타를 떠난 2주 후에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던 게이코는
당시 엔화의 고공 행진으로 인한 금전적 횡재를 뿌리치지 못하고 체류를 더 연장해 
지중해의 저렴한 맥주와 와인을 양껏 마시다 귀국해 
환율의 직격탄을 맞고 고통에 신음하던 주위의 한국인들로부터 
부러움을 한몸에 사기도 했다.  

일본에 불어닥친 한류의 영향에 게이코도 결코 예외는 아니지만
다행히(?) 욘사마가 아닌 막걸리와 '찌지미', 김치를 좋아한다고 해서 우리를 어찌나 안심케 했는지..
한국에 오면 뭐가 젤 먹고싶냐고 물으니 뜸도 안들이고
"간장게장"
이라고 외친다.


간장게장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해서 어느 땐가 맛 볼 기회가 있었고 너무 맛있었단다.
해서 이왕 한국에 간다면 본토의 맛을 경험하고 싶다는게
그녀가 주저없이 간장게장을 외친 이유. 

허나 한국에 오면 어디 먹을게 간장게장 뿐이겠나?
비싼 음식이 아니더라도 저렴하고 맛도 뛰어난 한국의 맛을 굳이 열거할 필요는 없다.
허나 3박 4일의 짧은 일정, 그나마도 우리랑 함께 다닐 시간은 고작 이틀뿐이어서
이것저것 미각의 즐거움을 맘껏 누리는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늦은 저녁,
공항에서 게이코를 픽업한 뒤 명동의 한 작은 호텔에 짐을 던져놓자마자 향한 곳은
종로 시사영어사 뒷편의 경북집.
24시간 운영하는 탓에 술을 찾아 불꺼진 도심을 헤매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공간이지만
사진의 전들은 오래전에 부쳐놓은 걸 데펴주는 정도여서 맛이 떨어진다.
갓 부쳐냈을 때의 향과 촉촉함은 대개 사라지고 퍽퍽한 질감만이 남았다.

그때그때 부쳐내는 수고로움이 만만치 않겠지만 고집스레 지켜낸다면 
돈과 더불어 덕과 명성도 쌓을텐데..
그래도 늦은 밤의 술집다운 푸근함, 저렴한 가격(모듬전 7,000원)으로 아쉬우나마 찾게 되는 집.




예전 광화문에 출퇴근하던 시절 점심때 가끔 가던 장원삼계탕. 
삼계탕보다는 1천원 더 비싼 약계탕을 주로 먹었었는데 게이코의 경계를 무시하고
'일단 먹어 봐' 하는 심정으로 약계탕 주문.  
한약재의 구수함이 고급스럽게 느껴져 좋고
찬으로 나오는 뻘건 생마늘 짱아찌의 알싸함은 그 맛을 아는 이에게만 미소를 허락한다.
게이코가 그 맛을 알 턱이 없지만 그래도 본토 삼계탕의 맛에 미소를 잃지 않는다.
인삼주도 한 잔씩 곁들였으니 더 없이 즐거워야만 하는 시간.  
허나 노회찬의 말마따나 민주화 이후 최대의 비극이 벌어진 이날이었으니,
TV를 곁눈질 해가며 인삼주잔을 비웠다.




같은 날 저녁, 게이코가 노래를 부르던 바로 그 간장게장이 펼쳐졌다.
사실 게이코를 위한 간장게장 이벤트를 꽤나 고민했었다.
인터넷으로 인천의 간장게장집을 샅샅이 뒤졌고
 양 대비 싸게 먹을 방법으로 인터넷 쇼핑몰에서 간장게장을 주문해
만만한 식당에 싸들고 가 웃돈을 좀 얹어 양해를 구하고 그야말로 입이 쩔도록 먹여볼까도 생각했었다.
허나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 물리치고 결국 인사동의 신일집에 한 상 깔고 앉았다.
게장정식이 1인 2만원이니 이 동네서 이 가격에 먹기에 꽤나 저렴하다. 
마침 남도음식을 내는 집이니 자잘한 찬꺼리에도 기대가 된다.
 



헌데 나온 것을 보니 짜잘한 크기는 그렇다 쳐도 기대한 꽃게장이 아니다.
꽃게 딱지에는 저 요상한 반점이 없는걸로 아는데 대체 무슨 게일까? 황게?
살짝 뒤통수를 맞았지만 제법 알찬 속과 푸짐함에 곧 생각을 고쳐먹고..
밥 위에 속살을 얹어 참기름을 한 두 방울 찍어 발라 입으로 넣으니
다음부턴 숟가락에 모터가 달린다.  
꽃게건 황게건 게는 역시 게다.
게이코도 공기밥 추가.




다음 날,
자유로를 달려 임진각에서 망원경으로 북한의 실상을 보여준 뒤 일산으로 왔다.
우리가 일산에 살 때 세 손가락에 꼽던 맛집
일산칼국수.

닭을 푹 고은 육수에 바지락을 쏟아부어 절묘한 맛의 지점을 일궈낸 집.
여름엔 콩국수도 팔지만 역시 주력은 칼국수.  
옵션은 닭을 달라고 하면 일일히 손으로 뜯어낸 닭살을 고명으로 푸짐하게 얹어주고
바지락을 달라고 하면 바지락을 푸짐하게 얹어주는 시스템, 허나 이날은 조금 빈약한 느낌..
1년 만에 찾았는데 가격도 6천원으로 올라 살짝 빈정.
그래도 맛의 포로로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렬은 여전히 길다.
15분을 기다려 입장, 한 사람앞에 한 그릇씩 먹는다.




삼계탕 먹을 때와 마찬가지로
저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냈는데 솔직한 이유를 물으니 
"맛있어서"
라고. 

칼국수는 게이코도 미처 예상치 못한 맛이었던지 이후 보내온 메일에서
칼국수에 대한 인상과 그리움이 잔뜩 뭍어났다. 

 


같은 날 저녁.
홍대로 날아와서 야외 테이블에 한판 벌였다.
날씨 선선하고 저물어가는 휴일 마지막날이니 한가롭고 주변에 낮은 수풀이 병풍을 이루고
 백열 조명아래 오손도손 고기 뒤집고 잔 기울이는 이웃들을 보니 더 없이 좋구나.
맥주 한 병으로 가볍게 입가심한 뒤 이후부턴 소주로 달렸다.

삼겹살 먹는 방법에 대해서도 가르쳐줬는데
1. 잔에 소주를 채운다.
2. 자기 앞에 잘 익은 삼겹살 한 점을 미리 대기시켜 놓는다.
3. 상대방과 술잔을 부딛친 뒤 단숨에 털어 넣는다. 쭉~!
4. 대기시켜 놓은 삼겹살을 입안에 넣어 알콜을 신속히 중화시킨다.
5. 1~4의 과정을 반복하며 취향에 따라 템포를 조절한다.

삼겹살을 외국인에게 표현할 때 그 어휘는 '바베큐'일 수 밖에 없는데
자꾸 생뚱맞다는 느낌이 지워지질 않는다.
그래서 세상에는 '바베큐'와 더불어 '코리안 바베큐'가 따로 있는건가?

사기충천해서 돌아간 게이코는
2차 한국여행을 위해 손님들에게 열심히 약을 팔고 있고
우리는 느긋하게 2차 미각리스트를 정리하고 있다.
광장시장의 녹두부침, 무교동의 북어국, 마포 을밀대와 동네 짜장면.. 
Posted by dalgonaa
어제 수퍼에 가보니 요란한 선물바구니들이 가득가득 쌓여있다. 마치 크리스마스 대목처럼. 무슨 영문일까 싶어 생각해보니 부활절 때문이더라는. 우리가 딱 1년 전, 몰타로 들어가기 전 로마에 잠시 머물 때 한인민박을 찾은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많이 만났는데 대부분 유럽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들로 부활절 연휴를 맞아 로마여행을 나선 것이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부활절 대목을 노리고 쌓여있는 상품 가운데 지난 크리스마스때 김군을 사로잡은 BAULI사의 빠네또네(모양은 좀 달라졌지만)가 또 다시 눈에 띄어 여간 반가운게 아니다. 부풀어 오른 빵 위에 아몬드가 통으로 박혀있고 흰 설탕가루를 솔솔 뿌려낸 빵. 뜯으면 닭고기 살 처럼 뜯어지면서 속에 심심찮게 박힌 건포도가 맛을 두 배로 뻥튀겨주는 바로 그 빵. 과연 지난 번 맛본 빵과 똑같은 맛일지는 사서 먹어보기 전까진 모르는거지만 기대는 크다. 다만 지금은 가격이 조금 비싸니(6~8유로) 지난 크리스마스 직전과 직후에 가격이 대폭 떨어졌던 것 처럼 이번에도 그러길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 이제 정확히 1년이 됐네. 1년 전의 로마는 엊그제처럼 기억이 생생한데 이후였던 몰타는 어째 로마보다 훨씬 전의 일처럼 느껴지는게 좀 신기하다. 몰타의 태양은 영원히 잊지 못할 듯. 등짝을 홀라당 태워 며칠을 고통에 신음케 했던 태양이니 더더욱 그렇다.  아무튼 오늘로부터 대략 한 달 사이로 이곳 일정을 정리하고 다음달 중순 경이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지 싶다. 오늘 부동산 프란체스코가 새로운 손님과 집을 보러 온다는데 지난 번 중국 학생들은 이 집이 맘에 안들었던 모양이다. 이들은 맘에 들어하길. 그게 잘 풀리면 볼로냐나 베로나에서 남은 한달을 보낼 생각이고 그래서 지금 먼저 볼로냐를 중심으로 정신없이 집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사실 지금 하고있는 영상작업이 이달 안으로 마무리된다면 떠나기 전 까지 그간 못가봤던 이탈리아 이곳저곳(뿔리아와 시칠리아!!)을 돌아다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 아쉬움은 4월 12일, 베로나에서 열리는 이탈리아 최대 와인축제, 비니 이탈리아(VINI ITALIA)로 대신할 계획. 입장만 하면 이탈리아 전역의 모든 와인을 공짜로 마실 수 있고 그 때문에 이탈리아 길가에서 결코 보기 힘든 '길바닥 피자'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고.. 이탈리아에선, 적어도 볼로냐에선 길에서 누가 토하고 있으면 역시 누가 연락해 엠블란스로 싣고간다는데 한국과 참 다르다 싶다. 

아무튼 인터넷에 나와있는 단기 월세집 정보는 물론 볼로냐 대학가에 덕지덕지 나붙어 있는 개성만발의 룸메이트 구함 전단지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중이다. 허나 십수군데와 전화통화를 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물건은 나타나지 않은 상황. 조금씩 초조해지고 있다. 추위로 고생했던 뻬루자에도 봄은 오고 있어 지낼만은 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볼로냐의 따뜻함과 북적임, 큰 도시가 갖는 어떤 흡입력에는 역시 비교가 되질 않는다. '인간적'인 냄새가 아닌 '인간들'의 냄새가 지금은 좀 더 끌리는 상황. 특히 이번 취재로 몇몇 볼로냐 사람들과 친숙해졌으니 이들과 가끔 밥이나 술을 마시는 것도 재밌을 터.

볼로냐 두오모 옆으로 좁은 골목을 헤집고 조금만 들어가면 찾을 수 있는 뜨라또리아 BATTIBECCO의 에리카도 그 중 한 사람. 사실 그녀뿐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와도 친숙할 수 있는데 아버지는 영어를 못하셔서(또는 우리가 이탈리아 말을 못해서..). 에리카는 바띠베꼬의 소믈리에 겸 웨이터고 아버지는 은퇴한 요리사다. 바띠베꼬는 볼로냐에서 32년째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름 유서깊은 식당으로 얼마전 까지 미쉘린으로부터 별 하나를 받았었다. 프랑스와 퓨전풍을 최대한 높인 마르코의 식당과는 달리 볼로냐의 정체성을 헤치지 않는 가운데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킨 요리를 내고 있고 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식당. 식사를 하다가 에리카가 올해 6월에 일본을 여행할 계획이라는걸 알고 일본의 게이코(몰타에서 만났던)를 그녀에게 소개해주기로 했다. 게이코도 언젠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한 농가에서 요리를 잠깐 배운적이 있고 둘 다 영어를 할 줄 아니 동경에서 만나면 재밌게 수다를 떨 수 있을 듯. 

추가촬영을 마치고 어제 뻬루자로 돌아왔다. 수퍼에 들러 쌀과 채소를 샀고 집에 오자마자 곧 밥을 지어 채소 쏟아붇고 고추장 벅벅 비벼 비빔밥을 해먹었다. 마치 복수극을 펼치는 심정으로. 볼로냐에서 식사비로 지출된 금액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식탁은 채소가뭄이 심각했다. 물론 시장에는 저렴한 채소가 넘쳐나지만 적어도 식당 요리에는 많이 쓰지 않는다. 이는 비단 볼로냐만의 문제가 아니라 베로나를 비롯한 북부 대개의 도시가 그런 듯 싶다. 이들은 채소를 날 것으로 먹기 보다는 푹 익혀서 먹기를 좋아하는데 예를 들어 시금치, 또는 그와 비슷하게 생긴 녹색 채소는 완전히 푹 익혀서 거의 곤죽형태로 즐기기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그걸 많이 먹는 것도 결코 아니다. 섬유질 섭취가 부족하니 나오는건 똥배.

마르코 식당의 수쉐프인 엔리코는 몸무가게 거의 110kg에 육박하는 거구인데 마르코로부터 툭하면 핀잔을 듣는다. 채소 좀 먹으라고. 그런 마르코도 우리가 볼 때 채소를 많이 먹는건 아니어서 파스타 먹을 때 샐러드를 조금 곁들이는 정도가 전부다. 미국인들의 주체할 수 없는 고칼로리 섭취와 이탈리아의 지중해식 건강 섭취가 종종 비교되곤 하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이 미국인들처럼 '짐승'을 닥치는대로 먹어치우지는 않지만 전분덩어리인 파스타, 피자를 아주 적은 채소를 곁들여 먹는 탓에 이들도 비만문제를 남의 일로만 바라 볼 처지는 아니다. 허리살, 허벅지 살 심각한 사람들 제법 많다. 다만 이탈리아 사람들이 올리브유와 토마토, 하루 석잔 이상의 에스프레소. 그리고 전반적인 식사량이 적다는 것이 미국과는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일 듯. 이탈리아 사람들 마늘 많이 먹는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 많은데 새빨간 거짓말이다. 얘네들 마늘 진짜 안먹는다. 파스타 볶기 전에 기름에 살짝 튀겨 향만 낼 뿐이고 그 다음엔 철저하게 꺼내 버린다. 남부는 먹을 때 골라낸다나..

아점을 준비해야겠다. 경준이 서울에서 보내온 총각김치를 끝내 우리 손에 들려보냈는데 오늘 점심은 된장국에 총각김치다. 한국음식의 우수성은 몸이 안다. 십중팔구 다음날 쾌변.
Posted by dalgonaa

경자(敬子), 이를 일본 이름으로 바꿔내면 '게이코'가 된다. 경자는 일본 사람이다. 도쿄의 세타가야쿠라고 하는 제법 부자 동네에서 살며 또한 그곳의 한 약국에서 일한다고 한다. 그녀는 약사다. 작년에 서른을 넘겼고 다니던 약국을 용감하게 그만두고 거의 두 달 일정으로 몰타로 건너왔다. 차분한 사교성과 뒤로 빼지 않는 적극성, 그리고 제법 단단한 주량 등을 두루 갖춘 그녀는 그간 우리가 간간이 봐왔던 일본사람과는 좀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다.

며칠 전, 파파라치에서 식사를 마치고 집에 가던 중 유카타를 차려입고 한 손에 초밥 봉지를 들고 길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게이코를 만나 깜짝 놀랐었다. 유카타를 챙겨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던 것. 같은 동양권인 우리의 눈을 한눈에 사로잡았으니 다른 외국인들에게 비친 그녀의 모습은 또한 얼마나 매력적이었겠는가? 이날 그녀의 교실 친구들과 함께 선생집에서 작은 파티를 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는데 후에 들어보니 사진 모델역할 하느라 진을 뺐다고 한다. 사실 그녀 또한 그것을 은근히 즐겼을 터.

이 날로 부터 대략 1주 전, 게이코가 우리에게 지중해식 카레라이스를 해주겠다며 집을 방문했다.



일본에서 손수 들고 온 고형 카레. 정말로 '지중해카레'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일본의 카레야 비록 자국 내에서긴 하지만 카레의 본고장인 인도 못지 않게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음식. 오뚜기 카레만 있는 우리와 달리 저렇듯 '지중해'라는 남다른 맛을 선언한 카레도 숱하게 존해하는 곳이 일본이니 이날 게이코의 지중해 카레에 기대가 모아진다.




카레만이 아니라 요리에 필요한 양파, 당근, 감자 그리고 고기도 손수 사왔다. 좀 더 사와도 되겠건만 딱 요리할 만큼의 분량만 사왔다. -.-; 




오자마자 큰 냄비부터 찾은 게이코. 준비해둔 냄비를 보여주니 안심하고는 서둘러 재료손질에 들어간다. 이날 식사는 사실 이미 전에 한 번 우리집에서 깐풍기를 대접한 적이 있어 그에 대한 게이코의 보답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이 카레 또한 게이코가 묵고 있는 호스트 패밀리를 위해 손수 요리해 대접할 요량으로 가져온 것이었는데 그보단 우리에게 대접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겠다고 판단이 들었던 모양이다. 




당근을 썰어놓은 모습에 김군, 깜짝 놀랐다. 길쭉한 당근을 아주 정직하게 90도 각도로만 썰어온(그래서 언제나 동그란 모습) 김군이었는데 게이코는 전혀 다른 각도로 당근을 썰어낸 것. 단지 새로움에서만이 아니라 그 모양도 훨씬 예쁘다. 그리고 보니 어디선가 본 고급 카레에 든 채소가 바로 저런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일본식 감탄사 "에~!"를 농삼아 연발하며 저 모습에 관심을 보이니 게이코는 "랑기리"라고 말한다. 다양한 썰기의 한 이름이겠는데 우리로 치면 어슷썰기 정도가 될려나? (허나 일본어를 구사하는 우리집 시니어 '지희'에 따르면 '그냥썰기'라는 멋없는 해석을 내려준다)




계란도 삶고..  우리나라의 경우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주 싸구려 계란에서부터 특별한 관리를 통해 생산한 계란, 그리고 유기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란이 선보이지만 이곳 몰타 수퍼에선 오로지 딱 한 종류밖에는 취급을 안한다. 6알에 대략 1천원. 흰 계란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지금은 익숙해졌다. 우리도 예전엔 흰 계란만 먹었었는데 갈색 계란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계란 품질을 가늠하는 기준 하나는 깨뜨려 보는 것인데 노란 자위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터져버리면 그 계란을 낳은 닭은 가장 비윤리적인 관리하에 혹독한 상황에서 길러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그런 계란 숱하게 봤다. 하지만 이곳 노른자는 거의 터지는 법이 없다. 사육의 관리가 제법 엄격한 탓이리라 감히 추측해보고..




돼지고기도 썬다. 생돼지고기를 사왔는데 요리를 마치고 먹어보니 아주 부드럽다. 정육코너에서 가장 부드러운 부위를 달라고 하자 줬다고 하는데 후에 우리도 같은 고기를 사다 먹으면서 주인에게 물어보니 안심이란다.




큰 냄비에 기름 살짝 두르고 썰어놓은 고기를 넣는다. 그녀의 솜씨가 결코 서툴지 않다. 냄비 옆에선 밥이 익어가고 있고 두 개의 불판은 놀고 있다. 왼쪽 아래 큰 불판은 고장났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3개 뿐. 오븐 기능도 되지만 코일을 달구는데 들어가는 전기량이 엄청나기 때문에 감히 사용할 엄두를 안낸다. 2달 전, 유류값 파동으로 전기료가 정확히 2배로 뛰었다. 한국에서라면 대규모 시위로도 모자랄 엄청난 '배짱정책'이겠지만 여긴 조용하다.




치지직 ~ 볶아주니 고기빛이 금새 변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기가 꽤나 야들야들해 보인다. 큼직하게 썰어넣은 폼이 무척이나 맘에 든다. 가끔 카레 요리에서 채소를 오종종하게 채치듯 해서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싫다. 재료가 큼직큼직해야 재료 본연의 맛도 잘 살고 식감도 따로 놀지않아 좋다. 물론 보기에도 좋다.




당근과 감자, 양파를 마져 쓸어넣고 고기와 함께 달달달 볶아준다. 그리고 곧 물을 부어 채소가 자작하게 잠기도록 한다. 이렇게..




요리마다, 그리고 사람마다 저 마다의 관점과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는 언제나 그렇듯 오랜 경험과 시행착오에서 비롯되는 것들인데 게이코도 그런 경험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옆에서 물을 준비해 부어주겠다고 하니 그 물높이를 지적하는 폼이 신중하다. 물이 차오르는 것을 지켜보던 그녀는 어느 지점에서 '그만'을 분명히 외친다. 누구의 눈에는 좀 더 부어도, 좀 덜 부어도 될 물량이겠지만 그녀에겐 분명히 그녀만이 알고 있는 물높이가 있다.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요리하면서 말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변에 의견을 구한다. 처음에야 그것이 용납되겠지만 이후에도 그렇다면 이건 문제다. 주방의 군기가 쎄다는 이야기는 단지 칼과 불의 위험 때문만이 아니다. 자기 '예술'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고집을 확립하는 것은 요리하는 사람으로서, 적어도 남에게 자신의 음식을 대접하겠다는 사람으로써 꼭 갖춰야 할 자세이기 때문이다. 음식에 대한 남다른 고집을 지키는 음식점은 대체로 사람들로 인정을 받고 오래도록 살아 남으며 그들은 물높이에 대한 자신만의 엄격한 기준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나름 공들여 정리해낸 생각을 글로 마치고 다음 사진을 보니..  읔.. 민망함이 살짝.. 인스탄트 카레 덩어리라.. 그렇다고 게이코를 뭐라는 건 결코 아니다. 인스탄트라도 물높이는 언제나 중요하다. 라면 잘 끓이는 사람을 두고 그가 인스탄트 라면을 끓였다고 언제 손가락질 하던가 말이다. ^^    사진의 것 말고 하나가 더 있는데 두 개를 다 넣었다.




고형 카레를 넣고 대략 5분여를 풀어주고 한동안 뜸을 들이더니 게이코가 카메라쪽으로 몸을 휙 돌려 차렷자세를 취한 뒤 "오아리데스"라고 외친다. 끝났단다. 그 폼이 워낙 인상적이라 한 번 더 포즈를 취하게 한 뒤 사진을 찍었다. 따라서 이 사진은 연출된 사진. 하지만 그 상황은 같다.




이렇게 해서 지중해 카레가 만들어졌다. 색감은 얼핏 하이라이스를 연상케 하지만 맛은 카레다. 질척하지도 되직하지도 않게 딱 알맞게 요리됐다. 가끔 김군도 물량을 제대로 못맞춰 끓이다가 물을 더 붖거나 카레를 더 넣곤 하는데 게이코는 그런 실수없이 한 번에 완성해냈다. 그 공력이 놀랍다. 더불어 어수선함 없이 딱 필요한 행동만 취하면서 요리를 마쳤으니 주방의 모습은 별일 없었다는 듯 고요한 풍경이라 그 또한 놀랍다.





이번엔 우리차례. K-mart에서 미리 사다놓은 단무지를 꺼내 채친다. 카레라이스엔 깍두기나 김치, 또는 그밖의 아삭한 짱아치나 피클류가 제격이겠지만 없으니 단무지라도 있는 것이 어딘가? 그 존재감이 보석처럼 빛난다.




마늘과 파, 참기름과 고춧가루, 그리고 나름의 비법으로 식초를 살짝 뿌려 무쳐주니 단무지가 옥동자로 거듭난다. 서양음식에서 피클 말고는 아삭한 맛을 즐기는 음식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 식감에 길든 우리로선 해외 생활 오래되면 그 식감에 그리움이 사무쳐간다.




차려진 식탁. 보는 것 처럼 별 것 없이 카레에 달랑 단무지가 전부지만 나름 의미를 부여하면 한식과 일식이 공존하는 식탁이다. '닥꽝'도 일본서 유래된 것이라 치면 정통일식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엄마같은 손길로 손수 음식을 떠주는 게이코, 그 모습에 모두 흡족한 표정이다.





삶은 계란도 반 잘라 그릇에 내니 보는 즐거움이 더욱 커진다. 사실 게이코는 계란의 노른자가 반정도만 익기를 바랐다고 한다. 아무렴 어떤가?  고슬고슬 밥에 카레를 비벼 한 술 입으로 가져간다. 이 대목에서 우리집 시니어 '지희'의 표현을 고스란히 옮기면 이렇다.

"초콜렛 케익 먹는 것 같아요~"

우리로선 도무지 떠올릴 수 없는 맛이지만 초콜렛은 최상급 표현의 다름 아니니 그녀의 표현을 존중키로 한다.
초콜렛이 등장했으니 그럼 와인이 빠질 수 없다.




꼬부라진 병 주둥를 가진 독특한 모양의 와인 J.P CHENET. 프랑스산 로제 와인이다. 나머지 자세한 스펙은 자신없으니 통과.



멋진 만찬을 제공해준 게이코에게 감사를 전한다. 이후에도 게이코는 지금껏 만난 다른 어느 외국인보다 우리집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녀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가령 그녀의 외할머니가 이북 출신의 한국인이라는 것 등등.. 이외에도 감추고 싶은 속내까지도 털털하게 이야기하는 그녀를 우리는 좀 더 오래도록 좋은 친구로 남겨두고 싶다. 내년 우리가 한국에 귀국하면 그녀는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