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조는 있었다. 플랫의 막내가 입주한 후 그녀 혼자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려던 어느 날, 현관문 두 개의 열쇠 구멍 가운데 하나가 열리지 않아 2시간 가량을 문 앞에서 마냥 기다려야 했던 그 날이 바로 그랬다. 집에 돌아와 뒤늦게 그 이야기를 듣고 '쯧쯧.. 미숙한데서 온 문제였겠지..' 혀를 차며 속으로 막내를 구박을 했었다.

근데 어제, 저녁을 먹고 모처럼 저녁 산책 겸 인근 K-mart로 간장과 식초를 사러 나갔다 돌아와 문을 열려고 하니 그 때와 똑같이 문이 열리지 않는게 아닌가? 그때 바로 깨달았다. 막내의 미숙함이 아니었구나..

원인은 금새 파악됐다. 입주 당시부터 약간 덜그덕거렸던 문 손잡이의 잠금 장치가 문제였던 것. 안쪽에서만 잠그는 잠금장치가 비록 밖에서 잠그지 않아도 가끔 자기 스스로 허술하게 잠기는 문제가 있었던 것인데 그때 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겨오다 어제에 이르러 기어이 사고가 터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시간은 이미 9. 전화를 걸어 마땅히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마침 무슨 종교기념일인지 밖에서는 브라스밴드를 따라 사람들의 긴 행렬을 이루며 지나가고 있었다. '신이시여, 이 늦은 밤, 졸지에 집 없는 떠돌이가 된 우리들을 굽어 살피소서..'

하지만 구원의 전령은 없었다. 우리는 못미더운 신을 서둘러 지우고 앞집의 초인종을 눌러 도움을 요청했다. 문을 여는데 도움이 될 법한 도구가 있나 알아봤지만 이번 여름휴가를 즐기기 위해 독일에서 온, 3대로 구성된 가족들로부터 얻어낸 것은 버터 나이프가 전부. 자신이 직접 열어보겠다며 당차게 맨손으로 달려드는 할머니를 뒤에서 어린 손자가 물끄러미 지켜봤지만 열릴 턱이 없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거리를 떠들썩하게 했던 행렬은 이미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유난히 고요해진 그 시각, 플랫 식구 4명은 여전히 어두운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문 손잡이가 조금 더 벌어져 잠금 장치의 내부구조가 드러나긴 했지만 해결책은 그 좁은 틈 속에 어지럽게 얽혀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난해했고 버터 나이프는 덜그럭 덜그럭 같은 수고만 반복했다. 절망이 엄습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물러설 순 없었으니.. 이 순간, 우리에겐 3가지의 선택이 있었다.

첫 째는 현관 유리를 깨고 들어가는 것, 둘 째는 큰 망치를 구해 문 손잡이를 부숴버리는 것, 셋 째는 가장 위험한 것으로 마침 집이 3층 꼭대기 층이니 옥상으로 올라가 발코니 처마로 접근한 뒤 거기서 재주껏 발코니쪽으로 힘껏 뛰어 내리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 세가지 안을 놓고 잠시 토론이 오갔다. 가장 깔끔한 것은 발코니를 통해 들어가는 것이지만 세 가지 안 가운데 도박성이 가장 컸다. 도강에 실패할 경우.. 생각만해도 끔찍해 이는 곧바로 접었다.

유리를 깨고 들어가는 문제도 결국엔 이미 못쓰게 된 문 손잡이에 이어 유리문제도 해결해야 하는 숙제로 이어진다는 것이 문제였고 마지막으로 손잡이를 부술 망치를 이 늦은 시각에 어디서 구할지가 문제였다. 어느 것 하나 뾰족한 대안은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모두가 우려하고 기피하면서 감히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던 나머지 네 번째 안을 조용히 제안해 '의결'키로 했다. 그것은 각자 흩어져 하루 잘 곳을 찾아 들어간다는 것.

김군과 강양, 지희는 타군의 집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막내는 학원 친구의 집으로 들어가기로 하면서 늦은 밤, 1시간 넘게 이어진 현관문과의 씨름은 일단 막을 내렸다. 건물을 나와 길바닥에서 집을 올려다 보았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시쳇말로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그 기분을 뒤로 하고 터벅터벅 발길을 옮겼다.

다음 날. 8 타군네 집을 나와 가까운 철물점을 찾았다. 사정을 설명하자 친절한 철물점 주인은 우리에게 MIKE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넸다. 우리는 MIKE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꾸물거림 없이 전화를 받았고 주소를 되물은 뒤 15분 후에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우리는 살짝 들떴고 지희는 특히 더 그랬다. '반듯한' 모범생인 그녀는 수업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기대감만으로도 지난 밤의 낯선 불편함을 이미 잊은 듯 했다. 모두들 서둘러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 곧이어 마티즈 승용차 한 대가 도착했다. 알록달록 컬러와 귀엽게 형상화된 열쇠 그림으로 뒤덮인 마티즈는 마치 어린이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운전석에서 지희의 허벅지만한 팔뚝을 가진 사내가 내렸다. MIKE였다. 키는 작지만 우악스런 몸집의 그는 벌써 땀에 젖어 있었다. 그의 팔뚝에 새겨진 한문 문장의 문신을 본 곁눈질로 훔쳐본 지희는 전공인 일어를 통해 익힌 한문실력으로 그 뜻을 헤아려 봤지만 뜻이 엉망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마이크는 비싼 카메라가 튀어나올 법한 반짝이는 은색 금속 가방을 들고 올라왔다. 그리고 문제의 현관 앞에 섰다.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려본 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는 금속 가방에서 딱딱한 카드 같은 것을 꺼내 문틈 사이로 끼워넣기 시작했다. 김군은 눈치챘다. 잠금고리의 구조를 역이용하는 것으로 딱딱한 카드가 미끄러져 들어가면 문이 열리는 방식이라는 것을. 하지만 어쩐지 미덥지 못해 보였다.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MIKE 역시 같은 수고를 반복했고 땀도 더 많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우리 모두는 결코 내키지 않는 그의 패배를 직감했다. 결국 그 역시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우리를 돌아보며 양 어깨를 들썩하고 치켜세운 그는 '이건 마르코가 열어야 해요'라고 말했다.

마르코가 누구냐고 묻자 또 다른 열쇠공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의 이름과 전환번호를 알려주었다. 열쇠공이 자신보다 한 수 위로 인정하는 또 다른 열쇠공 마르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마이크와 달랐다.




>> 갑자기 졸음이 몰려온다. 재미없는 얘기를 가뜩이나 재미없게 써내려니 그럴 수 밖에.. 그냥 지워버릴까 생각하니 여기까지 적은 게 아깝다. 나중에 마저 정리키로 하고 우선 여기서 잠시 멈춰야겠다. 지난 밤, 타군네서 워낙 잠을 편히 못 잔 탓이다. 사진 하나 곁들인다. 고장난 좁은 자물통 틈에서 애꿎게 고생한 Butter Knife.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