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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19 금요일의 한 잔 Being a real Spritzer! 3
이딸리아 Italia 300908~2008. 10. 19. 00:18

금요일 오후, 놀자고 엘리자베타로부터 문자가 날라왔다. 어른들이 놀자라는게 딱히 뭐 있겠나? 밥 먹고 술마시는 것. 우리와 다소 다른 점은 밥을 먹기 전 식전주(食前酒)를 즐긴다는 것으로 우리에겐 없는 문화다. 식전주, 즉 아페리티프(Aperitif)는 프랑스에서 온 말로 한국에서도 그렇게 불려지고 있고 이탈리아 말로는 아페리티보(Aperitivo)라고. 아페리티보는 샴페인이나 화이트와인 등, 가벼운 알콜을 즐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곳 베로나는 화이트와인과 물 혹은 탄산음료에 캄파리(CAMPARI)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얼음과 오렌지, 혹은 레몬 한 조각을 띄어 낸 스프릿츠(Spritz)가 가장 대중적인 아페리티보다. 캄파리는 독특한 쓴 맛이 특징인 이태리 리큐르로 붉은 빛깔은 칵테일을 한층 멋쓰럽게 연출해 칵테일 애호가들에겐 이미 널리 알려진 술. 스프릿츠 가격은 한 잔에 2.5에서 3유로 선, 와인 한 잔 가격과 비슷하다.


8시 경 엘리자베따와 그녀의 전 남편 엔리코를 만나 미리 한 잔씩 하고 자리를 옮겨 그들의 다른 친구 3명과 합쳐 2차(?)로 두 잔을 더 마셨다. 스쁘릿츠는 대개 와인잔에 담아내지만 카페에 따라 더블 언더락 잔에 내오기도 한다. 카페마다 가벼운 한입꺼리 음식을 내오기도 하는데 운좋으면 주인장 서비스로 맛보기 리조또 등이 플라스틱 접시에 별도로 서비스되기도 한다. 어제 그 맛을 봤다는..



사실 스프릿츠는 베로나에 도착한 날,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첫번째 음료였다. 일단 한잔 하자며 우리를 이끄는 엘리자베따와 엔리코를 따라 들어간 노천 까페에서 마신 스프릿츠의 첫 인상은 '이건 뭐 술도 아니고, 음료수도 아니고...' 하지만 추위와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는 긴장감이 풀려서인지 그 '물 섞은 와인'에도 살짝 취기가 느껴졌다. 그 날을 시작으로 수 없이 시도해본 경험에 의하면, 허기가 느껴질 즈음 한 잔 마셔주면 뱃속을 은은히 데펴주면서 기분과 목소리톤이 살짝 상승하고 대화가 익어가기 시작한다. 스프릿츠가 바닥을 드러내면 이제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먹어치울 수 있다는 자신감만 남는다. 어서 내 앞으로 음식을 대령하라고!



가끔 들리는 풀리아(Puglia)식당의 목없는 잔과 오렌지 세팅. 그래도 얼음은 변함이 없다.



파도바 갔을 때 마신 스쁘릿츠. 색이 붉은 것은 캄파리를 섞은 것이고 투명한 것은 마티니를 섞은 것. 독특하게도 올리브를 하나 넣어준다. 알사탕처럼 입안에 굴려가며 씹어먹으면 독특한 풍미를 느낄 수 있은데 요때 한 모금 마셔주면 또 좋다.


양이 제법 많았던 Studio9의 스쁠리츠. 넉넉히 마시고 싶으면 앞으로 이집으로 가야겠다.



가게에 따라 간단한 핑거푸드, 땅콩 혹은 올리브를 함께 내주지만 어느 곳이나 변함없는 건 감자칩.



어떤 집은 거품이 더해진 색다른 모습으로 나오기도 하고.. 어쩌다가 스쁘릿츠가 베로네제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음료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베로나는 물론 북부 이태리 어디를 가던 스쁘릿츠 한 잔 마시고 밥먹으러 가는 여유로운 풍경을 볼 수 있을테다. 그런데 만약 진열장에는 분명 깜파리 병인데 깜파리만의 독특한 쌉싸름한 맛이 아닌 다른  맛이 난다면 그건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어제 엘리자베타와 스쁘릿츠를 마시며 들은 얘기를 소개하면 이렇다. 올해 3월 부활절 연휴의 어느 날, 그녀는 전 남편 엔리코와 함께 단골로 찾아가는 카페가 자리가 꽉차서 바로 옆집에서 스쁠리츠를 마셨는데 캄파리의 맛(쌉싸름한 맛)이 안나고 영 형편없더란다. 뭔가 속았다는 느낌이 들어 종업원에게 물어봤지만 대답이 없어 일단 계산을 치르고 홀로 들어가 주인에게 정중하게 스쁘릿츠에 넣은 것이 뭐냐고 물었단다. 그들은 당연히 캄파리를 넣었다고 답했지만 엘리와 엔리코는 수긍이 안가 재차 따져 물으며 캄파리를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카페측은 보여줄 수 없다고 했고 몇 번의 실랑이가 더 오갔다. 상황이 이쯤 되자 누구도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되버렸고 이제 양측은 마주 달리는 전차가 됐다. 누가 다쳐도 다쳐야 하는 상황.  

엔리코는 결단을 내렸고 그 자리에서 휴대폰을 꺼내 경찰을 불렀다. 그러자 카페측은 갑자기 행동을 바꿔 진열대의 캄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병에 남아있던 캄파리를 싱크대에 모두 쏟아버리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한 엔리코가 바텐으로 뛰어들었고 이를 종업원이 거칠게 제지하고 나섰다. 

몸 싸움이 커지자 한쪽에 쌓아 둔 와인잔이 바닥으로 쏟아지며 와장창 박살이 났고 그 소리에 놀란 야외 테이블의 손님들이 모두 홀 안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길가는 행인들까지 주목하는 상황이 되자 종업원들이 당황해 하기 시작했고 이틈을 타 이번엔 엘리자베타가 테이블을 넘어 바텐으로 뛰어들어 캄파리 한 병을 낚아채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캄파리를 가슴에 품고 절대 뺏기지 않게 몸부림쳤고 그 사이 경찰차 2대가 카페에 도착했다. 격앙된 카페는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고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엘리자베타는 품고 있던 캄파리를 경찰에게 건넸고 경찰은 병을 훑어보더니 한 마디 던지는 것으로 수사를 마무리 지었다.  

깜빠리가 아니구만 Non è il Campari"


카페주인은 가짜 캄파리를 섞은 혐의로 벌금 2천 유로(한화 350만원)를 내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로 마무리됐다.  대개 이런 경우 여론, 혹은 소비자의 힘으로 혹독한 응징을 당하기 마련일텐데 그 카페는 이후 어떻게 됐냐고 물으니 고개를 돌려 가리키며 여전히 장사를 잘 하고 있다고 한다. 단, 그날 이후로 가짜 캄파리는 섞찌 않을 것이라고. 그 집에 가면 주인이 알아보냐고 물으니 당연히 알아보며 그 앞을 지날 때 주인과 눈이 마주치면 서로 잡아먹을 듯한 눈인사를 나눈다고... 



스쁘릿츠 한 잔의 '진실'을 위해 몸싸움을 마다 않았던 엔리코와 엘리자베따. 베로제네이면서 동시에 이들은 진정한 '스쁘릿쳐'다. 



파도바의 한 골목을 지나다 발견한 옷가게 안의 표지판. 스쁘릿츠 문화의 깊은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어제 자정은 넘은 시각, 베로나의 메인 광장이라 할 PIAZZA ERBE에는 수 많은 '스쁘릿쳐'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가게 밖에서 잔을 들고 서성이며 술을 마신다는 건 우리나라에선 극히 드문 풍경일 터. 저마다 스프릿츠, 또는 와인 한 잔씩을 들고 저들 대로의 대화에 열중이다. 광장을 둘러친 건물로 인해 이들의 웅성거림이 마치 실내 체육관에서 느끼는 그것과 거의 같았는데 겨울로 접어드는 때가 저 정도고 여름에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그때는 광장 한 쪽에 세워진 빈병 수거함에 쏟아 부어지는 빈 와인병의 요란한 소음 간격이 더 짧아 질테다.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