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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31 코브라 3

관광객들에게 몰타는 삶의 환희겠지만 이들의 똑 같은 표정과 똑 같은 반응을 해마다 지켜보는 몰타사람들(몰티즈)에게는 그저 무료한 일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4 12일에 펼쳐지는 권투경기는 섬사람들의 무료함을 한 방에 날려줄 수 있을까? 한때 이곳을 지배했던 영국과의 일전이니 뭔가 큰 구경거리임엔 틀림없어 보인다.

 

내게 이날의 권투경기는 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유스호스텔 로비 게시판에 어느 날 붙은 포스터를 훑어보다가 깜짝 놀랐던 것이다.

아니? 이 사람은 바로..”

그렇다. 5유로짜리 싸구려 숙소에서 바로 내 옆 침대에 묵고 있는 그가 바로 코브라라는 닉네임으로 그 포스터에 박혀 있었다.

 

실제로 그는 뒤통수에 코브라 문신을 새겨 넣었다. 포스터 사진에선 그래도 좀 둥글둥글 한게 사람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좀 더 날카롭고 매서워 보인다. 어느 날 아침, 알고나 지낼 생각에 “Hello~ Are you boxer?  I saw the poster at lobby” 하고 어렵게 인사를 건네자 그는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짧은 대꾸 한 마디를 한 뒤 자기 침대로 들어가 버렸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이다.

글쎄.. 아마 내 침대 옆에 가지런히 세워둔 존슨즈 클린앤 클리어 로션과 니베아 크림, 엘라스틴 샴푸의 '요사스런' 향기가 코브라의 거친 야성을 거슬리게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좀 예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도 잠시, 나는 곧 슬퍼졌다. 포스터의 중심에 등장할 정도의 브랜드를 가진 그가 헝그리 복서도 아닐 텐데 고작 5유로짜리 싸구려 도미토리에 머물면서 손수 밥을 지어먹고 쫄쫄거리며 나오는 샤워에 몸을 씻고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를 나라에서 온 한 철없는 한국인의 측은지심을 발동시키고, 결국 이 모든 것에서 그의 곤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코브라에게는 펼치면 작은 화면이 나오는 DVD플레이어가 있는데 이것을 이용해 영화를 보는 것이 유일한 여가인 듯 보였다. 옆으로 팔베개를 하고 누워 화질도 엉망인(아마도 해적판일 듯) 영화를 보곤 하는데 어느 날 밤, 뭔가 큰 기계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잠깐 잠에서 깬 적이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플레이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아침, DVD플레이어를 어루만지는 코브라를 볼 수 있었다. 심각한 고장이 아니기를, 그리고 혹시 분노를 표출한다면 내가 숙소에 머무는 동안이 아닌 4 12일이기를 바랐는데 다행히 그날 오후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고 있는 그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며칠 전, 집을 알아보기 위해 부지런히 시내를 해안가 길을 따라 걷는데 코브라가 눈에 띄었다. 강한 햇살에 머리는 더욱 반짝였고 거친 이목구비는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강한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잘 발달된 상체와 달리 하체는 부실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강한 체력에 기반한 지능적 파이터라기 보다는 한 방을 노리는 스타일이라는 추측이 들었다. 평상복 차림에 과자봉지를 들고 어기적 걷는 그에게서 어딘가 부족한 자기 관리도 느낄 수 있었다.

 

어찌됐건 코브라가 링 위에서 어떤 경기를 펼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손수 밥을 지어먹으며 일전을 준비한 그가 상대에게 두들겨 맞지 않기를, 그리고 대전료만큼은 두둑히 챙겨갔으면 하는 바람이 굴뚝 같을 뿐이다.

 

(혹시나 이곳의 권투경기가 그 옛날, 우리나라 레슬링 경기처럼 흥행수입을 위해 짜고 치는 고스톱은 설마 아니겠지? 체계적이지 못한 선수 관리와 그런 선수를 경기의 메인에 등장시키는 경기운영이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워낙 작은 나라여서 그런가?)



>> 거리의 왠만한 상점 입구에는 저 포스터가 붙어 있다. / 주먹을 불끈 쥔 코브라의 모습. 코가 잔득 부어있는데 사실 실제 얼굴에 비해 얼굴 전체가 많이 부은 모습으로 나왔다. / 코브라의 침대. / 코브라의 그릇. 도착 첫날 음식을 해먹으려고 그릇을 찾으니 남자 숙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해서 방에 가보니 누군가의 사물함 위에 그릇이 있어 잠시 쓰고 갖다 놓으려다 말았는데 아마 코브라가 자신의 그릇 안에 된장이 끓고 있는 걸 봤다면 나를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 작동이 될까 의심스러운 전열기 앞에서 후라이팬의 음식을 뒤적이던 코브라의 뒷모습이 안타까운 잔영으로 계속 남아있다.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