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4.02 새로운 숙소의 시작 3
  2. 2008.05.24 주말밤을 달리다 1
아침, 전날 미리 예약해놓은 택시가 9시 15분에 딱 맞춰 도착했고 10일간 머문 베로나 숙소를 떠났다. 기차가 엉켜 볼로냐에 1시 30분에 도착. 앞으로 2주간 머물 새로운 숙소에 짐을 풀었다. 햇살을 한가득 담아내는 넓은 발코니, 혹은 옥상 마당을 가진 집. 홀로 사는 모든 여자들이라면 홀딱 반할 작고 이쁜 집. 뻬루자로 내려가기 전에 일찍 이런 집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토해내게 하는 집이다. 가격도 따지고 보면 그리 비싼 편은 아니고. 몰타에서 함께 술 많이 마셨던 타군도 런던에서 비행기타고 이곳에 왔다. 타군이 떠나는 일요일까지 함께 비니 이탈리을 부지런히 돌아다닐 듯. 볼로냐 역에서 타군을 마중한 뒤 집으로 오기 전 수퍼에 들러 맥주를 사는데 진열장에서 어슬렁 거리는 우리에게 타군,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저쪽에 박스 쌓여 있어요" 한다. 타군이 여전한건지 우리가 변한건지.. 헷갈린다.
Posted by dalgonaa

8시가 조금 넘어 파쳐빌의 볼링장에 도착하니 타군(君)과 루드빅이 포켓볼을 치고 있다. 학원에서 '타이거'라는 닉네임을 쓰는 그를 우리는 줄여서 '타군'이라고 부른다. 서울의 한 유명 광고회사을 그만두고 온 그는 몰타를 거쳐 런던에서 좀 더 공부한 뒤 유럽을 돌아다니다가 한국으로 되돌아갈 예정이다. 체코에서 온 루드빅은 두 명의 자녀를 둔 가장으로 스테인레스 스틸을 만드는 스페인계 회사의 중역이다. 이 두 사람 모두 김군의 교실친구들이다.

루드빅은 총 4주간의 영어공부를 마치고 내일 일요일, 체코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를 좀 더 특별하게 환송해주는 작은 자리를 만들 겸, 주말이면 떠오르는 술의 상념을 지울 겸, 그리고 거의 모든 주말을 집에서 칩거해왔던 생활에 변화를 줘 볼 겸 해서 김군과 강양은 집을 나섰다.

사실 오늘 외출은 9시 이후부터 1인당 10유로(16,000원)만 내면 맥주 한 병과 더불어 밤새도록 볼링을 칠 수 있다는 볼링장의 이벤트 전단지를 접함으로써 가능했다.

9시, 두 개의 레인을 잡고 나니 어느새 '선수'들이 9명으로 늘었다. 주로 가깝게 보는 한국인들이 대다수인 가운데 체코의 루드빅과 스위스의 마르코, 그리고 손이 자신이 밥줄이기 때문에 손에 무리가 가는 운동은 가급적 피한다는 슬로바키아의 치과의사 '블라도'가 유일한 관중으로 참석해 총 3시간의 볼링을 즐겼다. 김군은 급기야 엄지손가락의 손톱에서 살짝 피가나는 부상을 당했는데 굳이 김군만이 아니더라도 그야말로 뽕을 뽑고 가겠다는 한국인 특유의 '본전의식'이 유감없이 발휘된 3시간의 '혈전'이었다.

옆에 라인에서 볼링을 즐기는 다른 외국인(사실은 우리가 외국인이지만..)들을 얼핏얼핏 살피다 문득 든 생각은, 그네들은 거의 장난 수준으로, 또는 나름 진지함으로 게임을 즐기다 돌아간다면, 한국인들은 여기에 더해 일종의 '학습', 또는 '기술연마'의 기회로까지 확대, 발전시켜 어떤 결실을 거두겠다는 습성이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 특히 그것이 공짜라면 더더욱.

접힌 판에서 다시 화투를 꺼집어 내 혼자 복기를 한다거나 게임 마치고 남들 손 씻을 때 새로운 각오로 큐대를 잡고 집에 가자는 재촉 전까지 열심히 공을 친다거나 어제처럼 어느새 다 가고 우리들의 레인에만 불이 켜진 가운데 오로지 새로운 기술의 구사와 기술연마에 매진하는 모습이라든가.. 한국인들은 대개 학습능력이 뛰어나다고 일부에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얼추 그렇다고 판단해 왔는데 어쩌면 바로 어제 같은 풍경이 작은 답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같은 행동양식의 근본은 '본전의식'? 



>> 이 사람이 루드빅이다. 오른쪽은 리타의 Bar에서 마신 몰타의 정통맥주 시스크. 500cc 잔을 이곳에선 '파인트'라고 부른다. 가격은 3유로(4,800원)로 정통 Bar에서 마시는 건 역시 비싸다.

자정을 막 넘어섰을 때 볼링장을 빠져나왔다. 장시간 운동을 즐겼으니 이제 목을 축일 차례. 파쳐빌은 작은 동네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큰 나이트클럽이기도 하다. 모든 클럽의 입장은 공짜이며 지나다가 잠시 들어가 신나게 춤을 추다 나가도 문제가 없다. 그저 자신이 마실 병술이나 잔술 값을 지불하면 그만. 몇 걸음 옮기자 어느새 인파속에 뭍혀졌고 클럽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비트의 저음이 몸을 들썩들썩 뜨게 했다.

가끔 정복차림의 경찰이 짝을 이뤄 순찰도는 모습이 눈에 띄는 가운데 인사불성으로 바닥에 누운 남성, 그 옆에 뿌려진 토사물(밥알이나 김치, 콩나물 따위는 안보이더라는..),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각양각색의 남녀들, 술에 마비된 젊은 애들이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천정에 못박아 매달 것 같은 기세로 우당탕 거리는 한 켠에서 중년의 남녀가 이들에 아랑곳 않고 열심히 자신들의 대화에 열중하는 모습 등, 어느 장단에 휩쓸려야 할 지 '얌전한' 스포츠를 방금 마치고 나온 우리는 마치 물 위의 기름 몇 방울 처럼 저 틈에 도저히 섞일 수 없을 것 같다.

서둘러 그 혼돈을 피해 조용한 술집을 찾아 나선 이들은 우리 두 사람을 포함해, 타군, 농협을 그만두고 온 윤, 오늘이 결혼 1주년이라는 한국인 새내기 부부, 그리고 루드빅, 총 7명.

오래지 않은 물색끝에 학원 옆에 나름 조용한 Bar를 하나 찾아내 들어갔다. 27년 전 딸을 낳은 뒤 곧바로 영국에서 몰타로 건너온 '리타'는 마침 바로 그해에 이 술 집을 열었다. 가끔 'Bull shit !'과 'Fuck'을 내뱉는 그녀는 커피잔을 들고 스스럼 없이 다가와 우리와 어울렸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리타는 마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기도 한데 그녀는 우리와 대화 도중 바에서 술을 따르는 첼시 팬인 남편을 향해 이런저런 농으로 약을 올리거나 결코 분쟁으로 이어지지 않은 '싸움'을 즐겼다. 이는 적어도 김군과 강양에게는 색다른 여유로 느껴지면서 인상에 깊게 남았다. 우리 모두는 그녀 덕분에 좀 더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앞으로 이 Bar를 자주 찾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 술집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소개하는 기회가 있을테다.

떠나는 루드빅에게 이것저것을 물었고 이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야기는 와인. 체코의 서쪽지역은 와인재배로 비교적 유명하다고 하고 가끔씩 시간이 나면 가족들과 함께 친구의 농장을 찾아 포도를 따며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자동차로 따졌을 때 그 품질은 어느 정도 수준이냐 라고 묻자 '롤스로이스는 못되겠지만 메르세데스 수준은 된다'고 한다. 사뭇 그 맛이 궁금해지는데 체코를 방문할 기회가 생기면 루드빅은 언제든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한다. 자기 집이 무척 크다는 말과 함께.



>> 파쳐빌 중심부로 들어서는 입구. 각종 클럽이 다닥다닥 붙어 길게 이어지는 저 좁은 골목길은 그야말로 오픈된 나이트클럽이다. 주말 밤의 열기는 거의 아침까지 이어진다.

술집을 나오니 어느새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언제 다시 볼 지 모를 루드빅과 작별의 포옹을 나눴다. 그를 떠나 보낸 뒤 우리들의 발길은 각자의 집이 아닌 새내기 부부의 집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그 발길에 주문을 건 것은 '저희 집에 와인 한 병 있어요' 라는 한 마디.

마침 집도 가까우니 부담이 없다. 도중에 수퍼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어 타군과 윤이 와인을 한 병 더 사려고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이 주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는 "이곳에서 자정 이후에 술과 담배를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니 팔 수 없다" 라는 것. 이건 또 처음 듣는 얘기다.

짐작컨데 출입이 자유로운 파쳐빌의 클럽에 인근 수퍼에서 사온 저렴한 맥주를 사갖고 들어가는 것은 방지하기 위한 클럽과 수퍼간의 공생약정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즉, 파쳐빌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라는 것. 왜냐면 우리는 파쳐빌이 아닌 가게에서 냉장고의 캔을 꺼내 사마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새내기 부부가 제공하는 한 병의 와인에 라면을 잘게 부숴 끓이고 그들이 서울서부터 지고온 쥐포를 구워 먹고 마시며 못다 나눈 이야기를 떠드는 것으로 주말 밤의 바쁜 일정이 마무리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양 반의 선생인 조세핀은 아침마다 지중해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지켜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데 30분만 기다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며 하루를 마감할 상황이 됐다.

하지만 그러기엔 남은 기력도 없고 눈꺼풀도 무겁다. 심호흡을 들이키자 저 옛날, 비슷한 피로감에 종종 종로에서 새벽을 맞았던 차고 축축한 새벽의 공기맛이 이곳에서도 느껴졌다. 집에 도착해 끈끈해진 몸을 씻어내자 잠시 정신이 맑아진다. 거실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니 수평선 주변이 온통 붉다. 하지만 해가 솟구치는데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드라마틱한 색조의 향연을 잠시 감상한 뒤 침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쟁쟁한 밝기로 밤새 위세를 떨치던 둥근 달도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