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1.19 월요일을 생각하며 6
  2. 2008.05.24 주말밤을 달리다 1

월요일 아침, 날씨가 잔뜩 흐리다. 햇살이 방안을 칼날같이 비추는 맑은 날씨면 해가 점점 고도를 높여가는게 느껴져 이불을 박차고 나오곤 하지만 이런 날은 아침이나 오후나 별 다르지 않게 느껴지니 그 동작이 훨씬 굼뜨게 된다. 멀뚱멀뚱 천정을 바라보며 두서없는 생각에 젖었다가 정리하기를 반복, 그리곤 어제가 일요일이었다는 걸 잊고 있다가 잠시 월요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월요일.. 여행자에게 월요일이란게 뭐 별 의미가 있겠나? 사실 요일 자체가 의미가 없을지 모르겠다. 집세를 내야하는 한 달의 단 하루를 제외하고 날짜와 요일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게 여행자에게 주어진 특권일지도. 딱 1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볼까? 끔찍한 기억이지만 전혀 다른 시간과 환경에서 지난 추억을 떠올리는건 묘미가 있다. 마치 술마시다 군대시절의 추억을 곱씹는 것 처럼. ^^

금요일 저녁에 시작된 주말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무한자유를 얻은 마냥 신바람이 난다. 동행없이 저녁으로 순대국 한 그릇에 소주 한 병을 곁들이면 그것대로 적적함이 있어 즐겁고 일주일간의 끔찍한 전투를 끝낸 동병상련의 친구들을 만나 된장찌개 곁들여 삼겹살을 구우면 맘은 푸근해지고 피로는 씻겨나간다. 서글프게도 먹는 낙 뿐이었지만 즐거운 휴일의 시작임에 틀림없었다. 술로 지난 5일간의 지친 마음은 회복됐으나 몸이 망가졌으니 토요일은 휴식의 시간. 모처럼 동네 산책도 즐기고 잠시 짬을 내 동네 서점도 다녀오고 저녁에 맛있게 요리해먹은 장을 보러 인근의 시장이나 수퍼를 다녀왔다. 그것도 귀찮으면 동네 맛집책자를 뒤적이며 꿀맛같은 토요일 저녁의 낭만에 곁들일 요리는 뭘지 오랫동안 연구했다.

그렇게 토요일이 지나고 나면 이제 남는 건 달랑 1천원짜리 지폐 한 장 같은 느낌의 일요일 뿐. 늦은 아침겸 점심을 먹고나면, 정확히는 출발 비디오여행을 보고 나면 휴일 기분은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박경추 아나운서의 팔을 부여잡고 제발 이대로 끝내지 말아주길 애원하고 싶었던게 얼마였던가. 어김없이 이어지는 재방송 드라마는 조바심나는 일요일 오후를 더욱 낡고 참혹한 일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월요일의 공포가 그렇게 바짝 다가와 있었다. 영원히 떠 있어주길 바랬던 해가 어느새 땅속으로 꺼지고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 아무리 맛있는 식사라도 저녁을 먹고나면 포만감보다는 공허함이 뱃속을 가득 채웠다. 종종 주말을 함께 떠들며 보냈던 친구를 집까지 차로 바래다주고 돌아오면 어제 홀가분하게 돌아다니던 길, 가게, 불빛은 전혀 딴판으로 다가왔다. 별빛도 사라진 도시의 밤, 자전하는 지구를 원망했다. 

아침 7시 경이면 출근을 서두르는 차소리나 알람시계 소리가 아니어도 자동으로 몸이 깨어났다. 순간 깨질듯한 두통이 몰려오지만 화장실 거울앞에 어느새 칫솔을 입에 넣은 거울속의 자신을 쾡한 눈으로 보고 있노라면 그 통증도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오늘은 또 무슨 시덥지 않은 현실들을 지켜보며 애써 진지한듯 열심히 일하는 척 해야할까? 어차피 해야하는 일이라면 그 순간 만큼은 자의식을 지워버고 로보트처럼 생각없이 움직이고 싶은데 이는 비단 나만의 바람일까? 집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고 버스정류장에 선다. 그 속을 알 순 없으나 아마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비슷한 곳으로 끌려가는게 틀림없는 인간들. 아무말 없이 서 있는 그 무심함이 싫어 신문을 펼쳐들면 몇 분 지나지 않아 버스가 도착한다. 수용소행 열차에 몸을 싣는 듯한 어눌한 풍경.

그냥 집으로 다시 돌아가 모자른 잠이나 확 자버릴까? 아니면 지하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고물차를 몰고 나와 자유로를 달려 북부간선을 갈아탄 뒤 구리를 지나 양평, 홍천을 거쳐 동해바다로 달려버릴까? 도발이 유혹처럼 다가오는 것도 잠시, 오 맙소사.. 빈자리는 애초 기대하지도 않았고 다만 중간쯤에 내 한몸 세워놓고 있을 통로를 기대했는데 요금을 찍고나자 더 이상 한 발짝도 들어갈 수가 없다. 이런 사태가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버스는 출발하고 서고를 반복하는 사이 어느새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애초 기대했던 중간쯤으로 떠밀려 와있다. 가끔 운전기사의 과속을 경고하는 기계음이 불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조용히 가뿐 숨을 몰아쉬는 다른 승객들 틈에 끼어 스쳐가는 창밖의 풍경을 영혼없는 시선으로 던질 뿐이다.

일산을 출발한 버스가 화정에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버스안은 발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만원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버스에 오른다. 푸시맨을 기억하는가? 지하철의 문을 닫을 수 있도록 승객을 차내로 밀어넣던 사람들. 화정의 버스정류장에는 그들과는 좀 달리 입이 바쁜 푸시맨들이 있다. 버스회사 직원이 몇명 나와 "안으로 조금씩 들어가 주세요!"라고 승객들을 향해 외치는 것이다. 그리고 한결 낮은 톤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요금 찍어주시구요". 뒷문으로 오르는 사람들 가운데 다른 사람에 막혀 요금을 못찍는 경우가 있기 때문인데 어김없이 '요금'을 닥달하는 그를 향해 위태롭게 버스기둥을 부여잡고 있던 40대 중반의 멀쩡한 양복이 성질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말 좀 그만하세요!"

햇살이 차창에 부서져 반짝이는 어느날 아침이었다. 이 순간, 모든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이들은 도대체 여기 왜 이러고 서 있는걸까? 버스에 오르기 위해 필사적인 저 사람들은? 뭘 위해서? 난 왜? 이 버스에서 내리면 천국의 문이 열리기라도 하는걸까? 부질없는 질문을 되뇌이고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밤에 마약처럼 취해 몇 번이고 반복해 들으면 어느새 광화문에 도착했다. 근데 때로는 놀랍게도 천국이 펼쳐지곤 했다. 버스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을 향해 맞은 편에선 어디어디 교회 목사님과 신도들이 키타와 앰프를 동원해 포효하는 설교와 저들만 신난 가락으로 굉음을 퍼부어댔다. "주여~!" 영화 '라이언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을 기억하는가? 수륙장갑차의 문이 열리는 순간 빗발처럼 쏟아지던 총탄에 병사들이 하나 둘 쓰러져갔던 장면. 흡사한 풍경이었다. 대한민국을 말아드신 부동산, 그 장사로 부자가 된 장로님이 어찌어찌하여 대통령까지 꿰차고 앉은 현실을 보노라면 켁 하고 숨이 막혀왔다.

이런저런 삶의 악연을 끊고자 떠나온 길. 다시 멀뚱멀뚱 천정을 바라본다. 그리곤 문득 '앞으로 뭘 할지 좀 더 선명해졌다'는 생각을 한다. 뻬루자의 이 집이 좋은 이유 하나는 지금까지 지내온 집들 가운데 가장 조용하다는 점이다. 한국에 있을 때도 이렇게 조용한 집은 없었다. 그래서 생각에 빠져들기에 좋다. 아무튼, 그런 생각이 들자 그게 이번 여행의 의미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불혹의 나이에 새롭게 해야할 일이 많다는 사실에 괜히 신바람 난다는 생각까지 든다. 재미없는 삶을 안주삼아 씹으며 늘 얘기했던 식당, 즉 우리들의 놀이터, 어른들의 놀이터를 만드는 일이 그렇고 이를 위해 하나씩 준비해야 할 일들에 대한 기대, 그리고 또 다른 여행의 준비. 천둥벌거숭이처럼 떠나온 길이었고 모아둔 얼마 안되는 돈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가고 있는 현실이 두렵기도 하지만 돈은 돌고 돈다는 해묵은 믿음에 기대려 한다. 그리고 지난 연말 뻬루자의 한 공터, 한시적으로 열렸던 장터에 조악한 악세사리를 가지고 나와 팔던 방글라데시 출신의 나비가 우리에게 던진 역시 해묵은 메시지, 그러나 은근히 힘을 주는 이 말을 새삼 떠올려 본다. "이봐, 우린 최선을 다 할 뿐이야. 나머진 신이 다 알아서 결정하신다고"

Posted by dalgonaa

8시가 조금 넘어 파쳐빌의 볼링장에 도착하니 타군(君)과 루드빅이 포켓볼을 치고 있다. 학원에서 '타이거'라는 닉네임을 쓰는 그를 우리는 줄여서 '타군'이라고 부른다. 서울의 한 유명 광고회사을 그만두고 온 그는 몰타를 거쳐 런던에서 좀 더 공부한 뒤 유럽을 돌아다니다가 한국으로 되돌아갈 예정이다. 체코에서 온 루드빅은 두 명의 자녀를 둔 가장으로 스테인레스 스틸을 만드는 스페인계 회사의 중역이다. 이 두 사람 모두 김군의 교실친구들이다.

루드빅은 총 4주간의 영어공부를 마치고 내일 일요일, 체코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를 좀 더 특별하게 환송해주는 작은 자리를 만들 겸, 주말이면 떠오르는 술의 상념을 지울 겸, 그리고 거의 모든 주말을 집에서 칩거해왔던 생활에 변화를 줘 볼 겸 해서 김군과 강양은 집을 나섰다.

사실 오늘 외출은 9시 이후부터 1인당 10유로(16,000원)만 내면 맥주 한 병과 더불어 밤새도록 볼링을 칠 수 있다는 볼링장의 이벤트 전단지를 접함으로써 가능했다.

9시, 두 개의 레인을 잡고 나니 어느새 '선수'들이 9명으로 늘었다. 주로 가깝게 보는 한국인들이 대다수인 가운데 체코의 루드빅과 스위스의 마르코, 그리고 손이 자신이 밥줄이기 때문에 손에 무리가 가는 운동은 가급적 피한다는 슬로바키아의 치과의사 '블라도'가 유일한 관중으로 참석해 총 3시간의 볼링을 즐겼다. 김군은 급기야 엄지손가락의 손톱에서 살짝 피가나는 부상을 당했는데 굳이 김군만이 아니더라도 그야말로 뽕을 뽑고 가겠다는 한국인 특유의 '본전의식'이 유감없이 발휘된 3시간의 '혈전'이었다.

옆에 라인에서 볼링을 즐기는 다른 외국인(사실은 우리가 외국인이지만..)들을 얼핏얼핏 살피다 문득 든 생각은, 그네들은 거의 장난 수준으로, 또는 나름 진지함으로 게임을 즐기다 돌아간다면, 한국인들은 여기에 더해 일종의 '학습', 또는 '기술연마'의 기회로까지 확대, 발전시켜 어떤 결실을 거두겠다는 습성이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 특히 그것이 공짜라면 더더욱.

접힌 판에서 다시 화투를 꺼집어 내 혼자 복기를 한다거나 게임 마치고 남들 손 씻을 때 새로운 각오로 큐대를 잡고 집에 가자는 재촉 전까지 열심히 공을 친다거나 어제처럼 어느새 다 가고 우리들의 레인에만 불이 켜진 가운데 오로지 새로운 기술의 구사와 기술연마에 매진하는 모습이라든가.. 한국인들은 대개 학습능력이 뛰어나다고 일부에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얼추 그렇다고 판단해 왔는데 어쩌면 바로 어제 같은 풍경이 작은 답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같은 행동양식의 근본은 '본전의식'? 



>> 이 사람이 루드빅이다. 오른쪽은 리타의 Bar에서 마신 몰타의 정통맥주 시스크. 500cc 잔을 이곳에선 '파인트'라고 부른다. 가격은 3유로(4,800원)로 정통 Bar에서 마시는 건 역시 비싸다.

자정을 막 넘어섰을 때 볼링장을 빠져나왔다. 장시간 운동을 즐겼으니 이제 목을 축일 차례. 파쳐빌은 작은 동네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큰 나이트클럽이기도 하다. 모든 클럽의 입장은 공짜이며 지나다가 잠시 들어가 신나게 춤을 추다 나가도 문제가 없다. 그저 자신이 마실 병술이나 잔술 값을 지불하면 그만. 몇 걸음 옮기자 어느새 인파속에 뭍혀졌고 클럽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비트의 저음이 몸을 들썩들썩 뜨게 했다.

가끔 정복차림의 경찰이 짝을 이뤄 순찰도는 모습이 눈에 띄는 가운데 인사불성으로 바닥에 누운 남성, 그 옆에 뿌려진 토사물(밥알이나 김치, 콩나물 따위는 안보이더라는..),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각양각색의 남녀들, 술에 마비된 젊은 애들이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천정에 못박아 매달 것 같은 기세로 우당탕 거리는 한 켠에서 중년의 남녀가 이들에 아랑곳 않고 열심히 자신들의 대화에 열중하는 모습 등, 어느 장단에 휩쓸려야 할 지 '얌전한' 스포츠를 방금 마치고 나온 우리는 마치 물 위의 기름 몇 방울 처럼 저 틈에 도저히 섞일 수 없을 것 같다.

서둘러 그 혼돈을 피해 조용한 술집을 찾아 나선 이들은 우리 두 사람을 포함해, 타군, 농협을 그만두고 온 윤, 오늘이 결혼 1주년이라는 한국인 새내기 부부, 그리고 루드빅, 총 7명.

오래지 않은 물색끝에 학원 옆에 나름 조용한 Bar를 하나 찾아내 들어갔다. 27년 전 딸을 낳은 뒤 곧바로 영국에서 몰타로 건너온 '리타'는 마침 바로 그해에 이 술 집을 열었다. 가끔 'Bull shit !'과 'Fuck'을 내뱉는 그녀는 커피잔을 들고 스스럼 없이 다가와 우리와 어울렸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리타는 마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기도 한데 그녀는 우리와 대화 도중 바에서 술을 따르는 첼시 팬인 남편을 향해 이런저런 농으로 약을 올리거나 결코 분쟁으로 이어지지 않은 '싸움'을 즐겼다. 이는 적어도 김군과 강양에게는 색다른 여유로 느껴지면서 인상에 깊게 남았다. 우리 모두는 그녀 덕분에 좀 더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앞으로 이 Bar를 자주 찾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 술집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소개하는 기회가 있을테다.

떠나는 루드빅에게 이것저것을 물었고 이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야기는 와인. 체코의 서쪽지역은 와인재배로 비교적 유명하다고 하고 가끔씩 시간이 나면 가족들과 함께 친구의 농장을 찾아 포도를 따며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자동차로 따졌을 때 그 품질은 어느 정도 수준이냐 라고 묻자 '롤스로이스는 못되겠지만 메르세데스 수준은 된다'고 한다. 사뭇 그 맛이 궁금해지는데 체코를 방문할 기회가 생기면 루드빅은 언제든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한다. 자기 집이 무척 크다는 말과 함께.



>> 파쳐빌 중심부로 들어서는 입구. 각종 클럽이 다닥다닥 붙어 길게 이어지는 저 좁은 골목길은 그야말로 오픈된 나이트클럽이다. 주말 밤의 열기는 거의 아침까지 이어진다.

술집을 나오니 어느새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언제 다시 볼 지 모를 루드빅과 작별의 포옹을 나눴다. 그를 떠나 보낸 뒤 우리들의 발길은 각자의 집이 아닌 새내기 부부의 집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그 발길에 주문을 건 것은 '저희 집에 와인 한 병 있어요' 라는 한 마디.

마침 집도 가까우니 부담이 없다. 도중에 수퍼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어 타군과 윤이 와인을 한 병 더 사려고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이 주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는 "이곳에서 자정 이후에 술과 담배를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니 팔 수 없다" 라는 것. 이건 또 처음 듣는 얘기다.

짐작컨데 출입이 자유로운 파쳐빌의 클럽에 인근 수퍼에서 사온 저렴한 맥주를 사갖고 들어가는 것은 방지하기 위한 클럽과 수퍼간의 공생약정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즉, 파쳐빌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라는 것. 왜냐면 우리는 파쳐빌이 아닌 가게에서 냉장고의 캔을 꺼내 사마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새내기 부부가 제공하는 한 병의 와인에 라면을 잘게 부숴 끓이고 그들이 서울서부터 지고온 쥐포를 구워 먹고 마시며 못다 나눈 이야기를 떠드는 것으로 주말 밤의 바쁜 일정이 마무리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양 반의 선생인 조세핀은 아침마다 지중해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지켜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데 30분만 기다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며 하루를 마감할 상황이 됐다.

하지만 그러기엔 남은 기력도 없고 눈꺼풀도 무겁다. 심호흡을 들이키자 저 옛날, 비슷한 피로감에 종종 종로에서 새벽을 맞았던 차고 축축한 새벽의 공기맛이 이곳에서도 느껴졌다. 집에 도착해 끈끈해진 몸을 씻어내자 잠시 정신이 맑아진다. 거실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니 수평선 주변이 온통 붉다. 하지만 해가 솟구치는데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드라마틱한 색조의 향연을 잠시 감상한 뒤 침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쟁쟁한 밝기로 밤새 위세를 떨치던 둥근 달도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