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8.08 이태리에서의 어떤 공상 3
  2. 2008.03.23 바티칸과 피에타 1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일어나 시리얼을 하나 부어 먹고 신김치 한 조각으로 입가심을 하고 학원 가기까지 남은 40분 동안 밤새 다운받고 있는 '식객' 열한번째 편을 다운받은 지점까지 봤다. 그리고 잠깐의 망설임 끝에 인터넷을 눌러보니 달고나의 방문횟수가 놀랍게도 1만을 넘어섰고 포털을 누르니 KBS 사장 해임소식이 톱을 장식한다. 잠시 밑으로 밀려난 올림픽 소식은 그러나 곧 톱으로 올라와 앞으로 2주간은 모든 정치적 이슈를 먹어 치우겠지만..

학원엘 가려면 늦어도 8시 20분에는 씻어야 하는데 8시 10분 쯤 강양에게 "오늘은 그냥 좀 쉴래"하고 말했다. '무슨소리야, 빨리 씻어'라고 완강하게 나왔다면 주섬주섬 일어나 씻으러 갔겠지만 그녀의 반응은 "10월에 어디로 갈지 구상이나 해놔"라며 차분하게 반응했다. 아마도 현재 김군반의 강사가 형편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김군의 마음을 헤아린 것일 수도 있고 자신도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향후 행선지에 대해 그녀의 주문대로 결정을 서둘러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거실 창을 등지고 앉아 있자니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등짝을 시원하게 문지르고 지나가는 느낌이 좋은 아침이다. 한국소식을 끊고 지낸다면 더없이 좋은 아침이겠지만 불행히도 그럴 순 없는 세상이 돼버렸다. 뭐 아침부터 머리 지끈거리는 얘길하려는건 아니고.



>> 강양과 식사를 즐기는 엘리자베타. 초점이 뒤에가서 맞았는데 오히려 이 사진이 나은 듯.

요 며칠 강양은 엘리자베타와 붙어 다닌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가 됐던 이태리의 베로나에서 온 그녀는 책 만드는 일을 하는 45살 이태리 북부 여성이다. 영어도 제법 잘하고 아는 것도 많고 세상에 대한 관심도 많아 강양과 그 호흡이 잘 맞는다. 며칠 전엔 김군은 쏙 빼놓고 두 사람만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1인당 30유로, 거의 5만원에 육박하는 식사를 즐기기도 했다.

뭐 먹고 얼마 썼냐를 꼬치꼬치 캐묻는 김군의 질문에 강양은 "이제 이태리 북부 가서 미아될 일은 없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이태리의 거점 하나가 생긴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우리가 외국친구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늘 이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집에라도 초대해 없는 재료로 나름 근사한 요리를 대접하는 것은 그런 의도가 노골화된 것일 뿐 ㅋㅋ.

엘리자베타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지금 하는 일이 너무 바빠서 집에서 요리해먹을 시간이 없어 주로 외식을 즐기는 탓에 일반적인 이태리 사람들과 자신은 조금 다르다고 자평한다. 집에서, 가능하다면 엄마가 해주는 저녁을 먹는 것이 이태리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풍경이라면 자신의 생활을 그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는 것. 그러면서 그녀 왈 "우리 오빠 내외가 곧 50살이 돼. 하지만 여전히 매주 한 번은 엄마집에 가서 엄마의 요리를 먹지. 잘 들어, 매 월이 아니라 매 주야"



>> 홍합과 조개 볶음. 그러나 어패류의 맛과 신선도에 있어서 한국의 품질을 따라올 것이 있을까?

마침 강양 수업시간에 '5년 후 나의 모습'이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다. 강양은 이에 대해 "아마 작은 식당을 개업해 운영하고 있을테고 자신은 홀에서, 남자친구는 주방에서 일하고 있을꺼다"라고 말했단다. 이에 대해 엘리자베타는 "그때 쯤엔 나도 지금 하는 일은 그만두고 수 처럼('수'는 강양의 영어 이름) 식당이나 카페를 운영하며 여유있게 살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그러자 이번엔 강양반의 또다른 이태리 친구인 알레산드라가 거들고 나섰다.

"수가 만약 한국에서 성공한다면 이태리 브랜치는 내가 맡겠다"라는 것. 컨설팅이 직업인 그녀는 그러면서 식당의 컨셉도 바로 공표했는데 '젋어지고 싶다면 한국인 '수'처럼 먹어라'. 40을 바라보는 나이의 강양 젊은 얼굴을 보고 강양반 모든 친구들이 '경악'했고 그 비결이 '한국음식 탓이다'라고 한 마디 툭 던진 것이 만들어낸 재미난 결과다.

이 모든, 시시껄렁 뜬구름 같은 얘기를 듣고 나선 한숨을 길게 뽑았지만 그냥 흘려보내기가 왠지 아깝다. 관광객과 예술품이 차고 넘치는 피렌체에서 밥장사를 하는 것도 제법 그럴싸 하겠지? 특히 요즘처럼 한국이라는 나라가 절망적으로 변해가는 상황에선 더더욱.. (그럼 제주도는 어쩌지?.. 공상처럼 친환경적, 평화적, 그리고 의외로 생산적인 놀이도 없다 ^^)



>> 보기만 해도 턱근육을 뻐근하게 만드는 저 놈. 다른 모든 상징을 떠나서 이 친구가 다른 입맛의 사람들에게도 환영을 받을까? 미디어에선 그렇다고 하는데 난 도무지 미디어를 믿지 못하겠으니..

Posted by dalgonaa

어제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아침이 되어서도 좀체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내를 돌아다니진 못할 테니 바로 요때가 바티칸 투어의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다. 바티칸 투어는 하루를 꼬박 돌아다녀도 모자를 뿐만 아니라 특히 바티칸 박물관에 전시된 37만점의 진기한 유물들을 전부다 보기 위해선 72시간을 꼬박, 그것도 전력질주로 뛰어다녀야 겨우 볼까 정도로 방대한 규모라고 하니 전쟁 노예들이 지어놓은 견고하고 우아한 지붕 아래서 비를 피하며 뽀송뽀송한 유물들에 파뭍혀 보자는 계산이었다.

 

숙소 사모님이 해주시는 아침을 서둘러 먹고 무려 120명의 한국인이 투어를 위해 모이기로 한 비토리오 엠마누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현장에는 이미 40여명 가량의 한국인이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이 가족단위다. 몇 년 전만 해도 젊은 배낭여행자들이 대부분이었겠지만 이제 그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다시 이곳을 찾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바티칸과 가장 가까운 오타비오 역을 나와 약 5분간 걸어가자 이른 시간임에도 우산 아래 줄지어 선 사람들이 보인다. 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떻게 유명 관광지에 줄이 없을 수 있겠는가?’

 

잠실주경기장의 400미터 트랙을 꼬박 돌린 인선(人線)’의 맨 뒤에 섰다. 이탈리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는 가이드는 개인별로 나눠준 리시버를 통해 로마의 역사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조금씩 바티칸으로 좁혀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끝으로 전성기의 로마는 코모두스의 집권과 동시에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검투사를 주인공으로 삼았지만 주변 인물과 시대는 바로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군사력을 지닌 장군들은 코모두스의 실정을 틈타 여기저기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는 로마제국의 멸망을 앞당겼다고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동행이 설명해준다. 나는 시저가 로마를 불질러 작살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설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비는 굵었다 가늘었다를 반복했고 저마다 우산을 하나씩 받쳐 들었다. 그렇게 40여분을 주춤주춤 걸어 성 베드로 성당에 입장했는데 그 사이에 새치기를 일삼는 백인들의 행태에 여러 번 분노를 삭여야 했다. 은근 슬쩍 다가와 마치 제자리였다는 냥 태연한 척 전방을 주시하는 그 하얀 얼굴에 된장을 처바르고 싶은 충동이 몇 번씩 솟구치는 걸 간신히 참았다.  

 

현재 바티칸의 주인은 독일 출신의 베네딕토 교황이다. 하지만 바티칸, 적어도 베드로 성당을 찾는 관광객들은 살아있는 그의 얼굴을 보기 보다는 성당 내부에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피에타를 보기 위해 몰려든다. 그리고 그 앞에서 열심히 카메라를 셔터를 눌러댄다. 우리처럼.

 

사실 유서 깊은 예술작품을, 그것도 조각작품을 제대로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조용히 주위를 거닐며 다양한 각도와 거리에서 보는 것이다. 그래야 새로운 부분도 보이고 조각에 전념하는 작가의 숨결과 손길을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에타는, 아니 어쩌면 바티칸 자체가 그런 시도가 불가능한 공간이 아닐까 싶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아다시피 넘치는 관광객들에 떠밀려 온전한 관람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하나와 또 하나는 이 넓디 넓은 공간이 모두 예술작품이자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에 도대체 어디에 시선을 머물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대충 시선을 툭 던져 눈에 들어온 조각 하나, 혹은 그림 하나를 툭 떼어 용산국립박물관에 가져다 놓으면 국보 몇 호로 지정돼 홀로 밝은 조명을 받으며 관람객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을 유물들이 그야말로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이다.

 

피에타는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피에타를 빛나게 하는 이름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미켈란젤로다. 빗질이 안되는 악성 곱슬에 누군가에 얻어맞아 비뚤어진 코, 160에 겨우 미치는 단신으로 유명했던 피렌체 출신의 사내 모습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과 미켈란젤로 자신이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최후의 심판에서 살짝 엿볼 수 있다.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미켈란젤로. 그는 자신을 인도에 포교를 갔다가 가죽이 벗겨져 죽은 성인으로 묘사했다. '아테네 학당'에 깜짝 등장하는 미켈란젤로와 이를 그린 라파엘로의 깜찍한 모습. 피에타에 새겨진 미켈란젤로의 서명과 오른쪽은 바티칸 투어에서 구입한 책자>

가이드는 조각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한적한 공간에서 준비한 사진을 곁들이며 피에타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이어갔다. 24살의 새파란 조각가는 남들이 자신의 조각상을 알아봐주어 명예를 얻기 바랐고 그래서 발표 후 조각상 주변을 기웃거리며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고 그러다 피렌체 출신의 곱사등이가 만들었다 더라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자신을 명확히 드러내자는 생각에 결국 애초 의도와 달리 마리아의 어깨 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고 그러다 후에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신이 신의 영역인 성모에 이름을 새겨 넣는 불경을 저질렀다는 이유 괴로워하다 이후 모든 조각에선 이름을 새기지 않았다고 가이드의 설명을 꼼꼼히 전해들은 동행이 숨가쁘게 이야기해준다.

 

못박힌 예수와 이를 안은 마리아를 일컬어 피에타라 부르는데 미켈란젤로 이전에도 많은 피에타가 존재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가장 극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아름다운 선과 정확한 균형미등도 이유지만 마리아의 표정에도 그 이유가 있다고 한다. 죽은 아들을 안은 슬픈 어머니의 얼굴이 아닌 침착하고 평온한 표정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묘사라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얼굴을 통해 기쁨과 슬픔, 분노를 표현하는 인간과 달리 모든 섭리를 꿰뚫는 신의 감정을 담고자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 극도의 슬픔에 직면한 마리아지만 그녀의 평화롭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한 얼굴 앞에 모든 불안한 영혼은 동요를 멈추고 평화와 고요에 젖어들 듯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에게 신이란 그런 존재 아닐까? 그 순간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이봐, 그건 이따가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난 후 이불 속에 들어가서 생각하고 이제 그만 비키란 말이야. 나도 사진 좀 찍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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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