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딸리아 Italia 300908~2008. 11. 3. 08:37

슬로우푸드 폐막식에서 재미난 해프닝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외교통상부 장관 쯤 되는 사람이 보내온 영상 메시지를 향해 참가자들이 야유를 보낸 것이 그것. 폐막식에는 이탈리아를 비롯 전 세계에서 온 대략 1만명은 돼 보이는 사람들이 운집했는데 이들의 야유란 화면을 등지고 서거나 휘파람을 붐으로써 장관의 이야기를 소음에 뭍혀버리는 거였다. 예상치 못한 풍경에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관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국가를 대변하는 고위 공무원의 발언이 무엇이었을지 얼추 짐작이 된다. 슬로우푸드에 참가한 사람들 대부분은 물론, 이 운동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에겐 기본적으로 정책을 지휘하는 사람들(고위 공무원이나 정치인)이란 곧 다양성을 말살하고 시장의 확대와 거대 자본의 이윤추구만을 돕는 '불한당'이라는 뿌리깊은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아마 그럴 것)

왜 아니겠나? 지역의 다양한 생산자들을 만나기 보다는 단 한 사람의 거대 생산자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고충을 해결해 주는 것이 그들의 일이니 말이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더라도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 한 통화 넣으면 금방 알 수 있는 문제. 


>> 폐막식 현장. 행사 막판 음악공연이 펼쳐지자 저 공간은 거대한 나이트장으로 변모했다.

사실 슬로우푸드 운동이란 그런 정치인과 정책의 불신과 배신감을 성토하며 탄생한 것이기도 하다. 로마의 유서깊은 '스페인 광장'에 등장한 미국산 패스트푸드에 대항해 생겨났다는 것은 표면적 이야기일 뿐, 그 밑에는 보다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위기의식이 깔려있다. 80년대, 효율성 재고로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신자유주의(세계화)가 레이건과 영국 대처에 의해 본격 추진된 이후 이제 그 시스템은 거의 전세계에서 작동하고 있다.

잠깐 우리 얘기를 하자면 한국은 그 시스템이 아주 '견실하게' 작동하고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효율을 통한 경쟁력 향상이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꺼라는 믿음었지만 그 과실은 결국 사람이 아닌 자본 자체, 그것도 극히 일부에 편중되고 있는게 현실이다. 즉, 극소수의 인간들이 부의 대부분을 독점해가는 중이다. 이는 비단 우리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겪는 균일한 문제다.

새정부는 이걸로 모자라 더 밀어부쳐야 세계시장에서 살아 남는다며 덩치 큰 기업(자본)을 키우기 위해 규제를 풀고 이들에게 각종 혜택을 쏟아 붓는데 골몰하고 있다. 대기업이 살면 대한민국 살림이 나아질꺼라는 믿음은 말짱 허상이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그것이 현실적 희망이라 굳게 믿고 있다. 비유하자면 생태계의 포식질서에서 밑바닥과 중간포식자에 투자하지 않고 상위포식자만 힘을 키워주면 그렇잖아도 힘이 쎈 그들이 모든 것을 잡아먹고 더 이상 먹을게 없어지면 그 생태계가 어찌될지 뻔하건만.


혹시 다른 나라의 큰 물고기가 우리 강에 들어와 작은 토종물고기 잡아먹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도 큰 물고기를 키워야 한다는 논리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잘 보라. 외국 물고기가 우리 작은 토종 물고기를 잡아먹는게 아니라 우리의 큰 물고기들이 몽땅 잡아먹고 있지 않나? 그리고 근본적으론 그런 식으로 먹고 먹히는 질서를 바꿔내야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절박한 문제다.

실업이 증가하고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자살하는 소규모 생산자들의 증가, 또는 농사를 접고 인근 공장의 파트타임 노동자로 전락하는 현실은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이곳 이탈리아에서도 부분적으로나마 진행되고 있다. 제3세계의 토지와 그곳의 토착성이 미국을 비롯한 이른바 '제1세계'의 방식으로 표준화되고 새로운 식민지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그곳 출신의 사람들은 꼼짝없이 지켜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괴물 신자유주의(세계화) 시스템에 빨려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철학, 운영체계, 지속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은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 곳곳에서 꼼지락 거리며 진행되고 있는데 슬로우푸드 운동도 그것의 하나다. 대량 생산을 위해 농약과 항생제를 쓰지 않고 빠른 생산을 위해 인공숙성을 시키지 않고 유전자를 조작하지도 않는 것은 물론 그런 생산물을 만들어낸 생산자에게 정당한 이윤이 돌아갈 수 있도록 유통을 혁신적으로 바꿔내려는 노력. 그러나 그건 정말이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우리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성실한 생산자가 정당하고 윤리적인 방법으로 질좋은 상품을 만들어도 이마트의 구매담당자가 이를 외면하면 소비자에 전달될 방법은 없다. 이마트가 도시를 벗어나 막말로 시골까지 파고들어 재래시장은 물론 구멍가게마저 초토화 시키는 마당에 판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게 오늘날 생산자들에게 지어진 무거운 짐이고 지역 소규모 판매자들이 처한 숨막히는 현실이다. (이마트가 월마트와 까르푸를 막아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생각을 바꾸라)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그래도 팔아보겠다고 트럭에 싣고 광고지라도 만들어 홍보할라치면 그 조악함에 당장 의심부터 하고 외면하는 것이 또한 오늘날 소비자들의 의식이기도 하다. 하긴 소비자들로써도 딱히 방법이 없다. 그러면 그 간격을 정부에서 일하는 넘들이 메꿔줘야 하는데 이 넘들이 그걸 안한다. 그리고선 늘 제도를 탓하고 법을 핑계대며 국회만 바라본다. 근데 어쩌랴? 국회에는 신자유주의, 효율과 경쟁력 강화를 목청껏 부르짖는 넘들만이 꽉꽉 들어차 앉아 법을 쥐락펴락 하는 걸! 총체적 난국이고 부실이고 꼬여도 더럽게 꼬였다.

그러니 오늘날의 생산과 유통, 판매에까지 일손을 뻗어야 하는 가혹한 현실을 체험으로써 잘 알고 있는 이들 생산자들이 낡고 비윤리적이고 공멸을 불러오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시스템을 여전히 필요한 가치인 양 힘 줘 설파하는 장관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할 이유가 있겠나? 어쩌면 그 정도 야유로 그친 것이 놀라운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생산의 기초 단위인 농부를 비롯, 식품 가공업자 등의 초기 생산자들에 의해 아래로부터 실천되고 있는 이 같은 움직임은 이 총체적 난국을 하나씩 풀어나갈 대안으로 주목받기에 충분하다. 

근데 이날 한 가지 의문이 든 것은, 이 '해프닝'에 대해 폐막식 단상에도 섰던 관계자와 인터뷰 하면서 살짝 물으니 답변을 피하더라는 것. 그는 '기본적으로 장관의 연설이 너무 길었다'는 문제를 지적했고 마지막에 장관의 이야기 중에 '그래도 우리가 인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말로 답변을 마무리지었다.

이태리 농림부 장관을 비롯 피에몬테 주와 토리노시, 이른바 권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행사다 보니 속시원이 말 못할 저간의 복잡한 상황이 없진 않겠지. 개운치가 않지만 기술적으로 풀어 낼 영어도 부족하고 공부도 더 필요한 만큼 일단 이 정도에서 접기로 했다. 그렇다고 이 문제로 슬로푸드 운동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 아니다. 설사 그렇다 쳐도 슬로푸드 운동은 이미 어떤 협회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있는 이라면 누구나 관심갖고 진지하게 실천하는 생활운동의 하나로 확대되가고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비단 슬로푸드 현장을 다녀와서 든 생각만은 아니지만 먹는 문제, 그 전반에 걸쳐진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작게나마 그간의 습관을 하나씩 바꾸고 실천해 가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자면 우선 대형 할인매장이 아니라 동네 채소가게를 이용하는 일 등이 그렇고 다소 비싸지만 유기농 매장이나 생협, 그리고 생산자 직거래를 이용하는 것 등이 그렇다. 평소 술 마시는데 쓰는 돈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인 일이백원을 아끼느라 덜덜 떨었는데 멀리 보면 그게 더 손해임을 이젠 알겠다. 

사실 수도권 집중화로 고통받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모델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구매관계를 맺는게 아닐까 싶다. 직거래는 그 한 예로 오늘날 직접, 또는 한 두 다리 건너 아는 생산자로부터 직접 제품을 구매하는 형태도 늘어가고 있다. 인터넷은 그것의 중요한 통로로 기능하고 있기도 하다. 

근데 지금 시점에선 질좋은 농산품을 구매하고자 하는 소비자와 생산자를 연결시켜주는 새로운 형태의 중간상인(?)이 출현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도시 소비자의 요구와 지역의 생산자의 특성을 파악한 뒤 생산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품목을 정해 이들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일종의 플래너.


소비자는 믿을 수 있는 생산자로부터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받고 생산자는 판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재배에 몰두할 수 있을테다. 플래너는 이들 사이에서 정보 교류는 물론 단지 생산자와 소비자만에 머물게 하는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참여와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해 이들이 지속가능한 공생의 관계로 맺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테다. 일부 생산자와 도시주민 간의 이 같은 형태의 관계가 맺어져 있긴 하지만 지속적 운영과 관리, 확대에는 이들의 역할만으론 한계가 있을 터.

따라서 이는 공공성이 생명이므로 정부차원에서 운영안과 관리기구를 만든 뒤 지자체 차원에서 실무를 담당케 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싶다. 그러면 현재의 중간상인들이 난리가 나려나? 밭떼기를 통한 한몫 장사에 도가 튼 일부 상인들, 그리고 그들에 종속돼 있는 농민들과 이들 사이의 부채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것도 쉬운 문제는 아닐테다. 정부가 나서라, 망할놈들 그 잘난 경쟁력은 바로 이런데서 써먹어야지 효율이니 뭐니 해서 인력만 줄이면 만사가 해결되냐 이넘들아! 

야유 받을 넘들은 비단 이탈리아 장관만이 아니다.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