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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5.17 브리티쉬 잉글리쉬
몰타는 영국령이었다. 온갖 유적과 박물관이 있는 Mdina라는 곳에 가면 이곳의 역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고 하는데 6개월간 머물 생각을 하니 결코 서두를 필요를 못느낀다.  이곳을 떠나기 전 한 번 방문할 생각이고 이후에 이곳 역사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쓸 기회가 있을꺼라 생각한다.

다만 대략 추측하는 것은 이곳이 영국의 식민지였음에도 특별히 저항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몰타어를 갖고 있고 이곳의 역사도 무려 6천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데.. 제국간의 쟁탈전이 심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기껏해야 무화과나 열리고 물고기나 잡아먹고 사는 코딱지만한 섬나라에 딱히 집착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탓일까? 

아무튼 토끼고기 요리와 빨갛고 둥근 우체통을 남겨 놓은 영국인들이 떠난 뒤 지중해와 햇살 하나로 먹고 살던 이곳 사람들에게 최근 각광받고 있는 또 하나의 산업이라면 그건 단연 영어다. 영국 식민의 잔재는 묘하게도 청산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이곳의 미래를 밝히는 자원인 셈이다.

학원에 가면 영국식 영어를 듣고 배운다. 그 영어를 배우기 위해 영국으로도 많이 몰려 가지만 저렴함에 따뜻한 햇살까지 갖춘 몰타를 찾는 유럽인들도 끊이지 않는다.  적잖은 강사들이 몰티즈들로 구성되긴 해도 이들 또한 영국식 영어의 영향하에 있는 지라 극히 일부 강사를 제외하고 영국식 영어에 가까운 발음을 구사한다.

영국 본토 출신의 강사들은 미국식 영어에서 유난히 도드라지는 'R'발음에 몸서리치곤 한다. 예를들어 'person'을 발음할 때 미국식은 '퍼-얼-슨'이라면 영국식은 '퍼-슨'이다. 매우 건조하고 담백하고 악센트가 명확한 것이 영국식 영어의 특징이라면 특징일 듯 싶다. 수업시간에 듣는 CD교재에 가끔 미국인 목소리가 등장할 때면 미간을 찌푸리거나 식용유 한 술 떠마신 표정의 강사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영국식 영어를 배운답시고 최근 영국 영화만 잔뜩 다운받아 틈틈이 시청중이다. 애초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노팅힐>,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이곳에서 다운받은 영화로  <네 번의 결혼식, 한 번의 장례식>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 <어바웃 어 보이> <빌리 엘리엇> <오, 그레이스>가 그것들이다.파일 두 개로 나눠진 영화 한 편 받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5시간. 밤새 찔끔거리며 받아봐야 겨우 50%이고 다음 날 학원 다녀오면 그제서야 영화 한 편이 완료되곤 한다.

서툰 영어라도 시급한 마당에 영국식이면 어떻고 미국식이면 어떻겠는가? 가끔 이런 문제를 놓고 사소한 논쟁이 한국인들 사이에 벌어지곤 하는데 개인적으로 영국식 발음이 훨씬 돋보이게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랜동안 굳어진 구강 근육은 이를 완벽하게 재연해내지 못할 것이 뻔하다. 뭐 어쩌겠나?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만 하면 만사 오케이거늘..



>> 김군을 가르치고 있는 Pepi Davidson Bond 양의 발음. 20대 초반으로 히피와 집시풍의 문화를 잔뜩 머금은 그녀는 몰타 남자친구를 찾아 영국에서 건너온 낭만의 British로 아시아 문화, 특히 태국과 일본, 인도에 관심이 많은 친구다. 언젠가 집에 초대해 한국음식을 먹여볼가 생각중인데 채식주의자인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메뉴는 역시 비빔밥일 듯.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