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를 핑계로 미루던 엑스포 테크노컴(www.expo-tecnocom.it) 전시장을 오늘(4일)에서야 다녀왔다. 요리와 관련한 전시라는 것 말고는 구체적인 정보를 얻고 간게 아니어서 혹시 볼꺼리보단 다큐멘트적인 것이 중심이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했는데 표를 내고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런 걱정은 말끔히 사라졌다. 전시장은 업소용 주방용품과 테이블 용품, 요리들로 가득차 한마디로 요식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비즈니스 행사장이었으니 우리에게(?) 딱이었던 셈.


사람들이 많이 모인 부스에서 한 요리사가 열심히 피자를 자르고 있다. 뒤에 보이는 오븐의 성능을 선보이는 부스로 이제 막 피자를 익혀낸 것. 조리를 마친 음식들은 모두 관람객들에게 시식용으로 제공되며 달라면 더준다. 들어오기 전엔 점심을 따로 사먹어야 하나 생각했는데 웬걸, 음식을 내놓는 부스에선 못먹여서 안달이다. 사실 관람객이 너무 적어 우리가 초조할 지경이었는데 그래선지 시식용 음식을 아끼지 않았다. 피자, 파스타, 또르뗄리니, 라비올리, 맥주, 와인, 이상한 초밥, 케잌, 젤라또, 커피. 이상 우리가 이날 행사장에서 먹은 음식들. 맛본 수준이 아니라 배가 터질 지경으로 먹어서(그들이 강제로 먹였다!^^) 어느 때는 들이미는 피자를 힘겹게 거절해야했다.


과일과 채소를 이용해 만들어낸 장식용 음식. 시도는 높이 샀지만 솜씨를 보구선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손재주는 한중일을 따라오기 힘들지 싶다.


가뜩이나 한산한 전시장, 우리가 유일한 동양인이다 보니 주변의 모든 시선이 한 번쯤은 우리를 향한다. 목 좀 축이자 해서 찾은 어느 BAR, 맥주 좀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하냐고 물으니 바로 우리를 스탠딩 테이블로 안내하고는 사진의 병맥주를 꺼내 저 탐나는 잔에 우아하게 따라준다. 그리고 또 다른 병을 꺼내 첫 잔을 비우길 기다리더니 또 다시 따라준다. 색이 진한걸 보니 흑맥주다. 맥주들은 모두 이탈리아에서 생산하는 것으로 수퍼에는 없고 오로지 식당에서만 맛볼 수 있단다. 맛을 표현하기도 이젠 좀 지친다. 한국에서 마시는 맥주맛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정도로 정리. 두 종류를 맛봤지만 지금 집에는 저 두 종류에 더해 다른 한 종류가 더 있다. 3병을 선물로 싸준 것. 감동이다.

시칠리아에서 그 곳의 특산 포도 품종인 네로다볼라와 그 외에 시라즈, 샤도네이, 카버네 쇼비뇽을 생산하는 소규모 프로듀서 피아나데이치엘리(Piana dei Cieli)의 관계자. 이번 행사는 처음 참여고 사실 이제 막 본격적인 홍보를 시작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젊은이들의 입맛이 와인보단 맥주로 옮겨가고 있다는 한 조사가 있다는데 비록 젊은이들을 겨냥한건 아니더라도 신생 와이너리의 시장진출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테다. 그런 탓에 이들이 내놓은 제품은 분명 더 연구하고 분발한 흔적이 베어있을 터. 마셔보니 음..  요즘 집에서 마시는 와인이라는게 5리터에 채 10유로가 안되는 이른바 '테이블 와인'(어디선 하우스 와인이라고도 부른다). 주목할 인상이라곤 거의 없는 그 맛에 찌들어 있다가 이놈을 마시니 그냥 웃음이 씨익 그려진다. 작년 3월 로마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소믈리에는 "요즘 네로다볼라가 뜨고 있죠"라는 수수께끼 같은 한 마디는 우리를 고민케 만들었는데 그 의문이 이제서야 좀 풀리는 기분이다. 오른쪽에 가지런히 진열된 와인들 모두가 고급 와인들인데 와인을 품은 저 진열장이 사실은 와인을 한 잔씩 따라내 주는 기계다. 일반적으로 고급 와인은 잔으로 파는 경우가 거의 없다. 콜크를 따면 그때부터 와인맛이 좋게든 나쁘게든 변하기 시작하고 콜크를 다시 막았다 해도 다시 열때 마다 향과 맛이 변해 애초의 맛을 기억하는 손님에게 같은 향과 맛을 유지시킨 와인을 제공한다는 것이 어렵다. 해서 한 두 잔만 원하는 손님이라도 병째 판매하거나 가격이 부담인 손님 입장에서 주문을 포기하는 수 밖에 없다. 헌데 저 기계는 공기는 차단하면서 와인을 뽑아내도록 제작이 돼 고급와인을 병이 아닌 잔 주문으로도 즐길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싼 와인은 굳이 저 기계를 쓸 필요가 없다는게 언니의 설명. 가격이 얼마냐 장난스레 물으니 꽤나 고가다. 이탈리아에서 마티즈가 6,990유로에 판매되는데 여기에 100유로를 더 얹어야 저 기계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우린 그저 좋은 공부한다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고가장비 얘기가 나왔으니.. 청년의 뒤로 보이는 석 잔을 동시에 뽑아내는 에스프레소 머신의 가격이 5,000유로가 조금 넘는다. 한국돈으로 900백만원. 한국 커피값 비싼 이유가 저때문이구나 싶다가도 이탈리아의 경우 로마를 가든 시골을 가든 에스프로소 한 잔이 1유로(1,800원)가 넘지 않으니 어디가 정상인건지 원..
 

시커먼 피자. 커피가루라도 뿌렸나 싶겠지만 저놈이 바로 송로버섯(분말)이다. 향이 무척 강해 피자를 한 입 베어물고 씹는 동안도 코로 향이 꽤나 진하게 퍼진다. 저거 외에 이거저거 곁들여 먹은게 많아 한 번 맛보곤 배불러서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지금 글을 쓰는 새벽, 스멀스멀 향과 식욕이 솟구치려한다. 바사삭 하면서 쫀득거렸는 도우도.. 아우..


초밥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많이 뚱뚱하지만 초밥 맞다. 생선을 올린건 아니고 지지고 볶은 각종 채소를 올렸는데 문제는 밥. 이탈리아에선 리조또할 때 쌀을 거의 안씻는다는거 혹시 아나? 리조또용 쌀로 밥을 지은거까진 좋은데 박박 씻질 않아 설익은 밥처럼 서걱리면서 초맛이 나니 영 먹기가 그랬다. 먹는 사람들도 별로 없는데 요리사는 신이 나서 계속 만들더라는..


젤라떼리아의 젤라또. 값비싼 유성 물감을 한 무더기 풀어놓은 듯 색감이 장난이 아니다. 어렸을 적 팔레트에 물감을 색깔별로 쭉 짜놓을 때 마다 먹고싶다는 충동이 일곤 했는데 그 꿈이 현실로 이뤄지는 순간이다. 상품성이 완벽해서 혹시 저건 돈내고 사먹는건가 싶었더니 뇌세적인 눈빛의 예쁜 이탈리아 언니가 작은 컵을 양손에 흔들어 보이며 먹겠냐는 제스춰를 취한다. '씨' 했더니 뭐든 골르란다. 4가지를 찍었더니 컵 두개에 넉넉히 담아준다. 물론 공짜. 이탈리아 아이스크림의 특징은 찹쌀떡 같다는 점이다. 쫀득거리는 질감이 한국것과는 다르다. 버석거리는 셔벗 스타일의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루겠지만 롯데삼강의 찰떡아이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 좋아할 터. 사진에서 보듯 데코레이션도 첨단이어서 그 앞을 무심코 지나치기란 매우 어렵다.


언젠가 꼭 손에 넣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황동 팬과 냄비. 뚜껑 하나도 꽤나 묵직하니 무겁다. 열전도율이 좋아 요리를 골고루 익혀내는데 저만한게 없다나..


BAR를 한다면 언젠가 만들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는.. 못하면 꼭 주문제작이라도 하겠다고 다짐하는 스탠딩 테이블. 속에 형광등을 넣어 그 자체로 조명이기도 하다. 저런 테이블에는 잔도 특별해야 한다. 그냥 밋밋한 잔을 올리면 안된다. 그렇지 않나?

앞서 얘기했듯이 관람객이 많지 않았다. 빈 부스에 앉아 스파이더 카드를 하던 어떤 아저씨의 애처로운 뒷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그때문일지 모르지만 이날 하루 예상치 못한 환대에 엄청 포식을 즐겨서 기분이 좋았고 이것저것 미처 생각지못한 것들을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어서 더더욱 즐거웠다. 여행이 때론 피곤하고 따분해지더라도 이런 일 때문에 계속 길을 가게된다. 그 길을 떠날 사람들이 앞으로도 줄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런 경험이 비단 우연만은 아니라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 가운데 중요한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우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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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거센 토요일 오전,
저 멀리 수평선 위로 두텁게 뒤덮힌 구름,
그리고 그 아래에 드넓게 떠 있을 시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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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치아 로사(Arancia Rossa)라는 '어륀지'가 있다. Arancia는 이태리어로 '오렌지'란 뜻이고 Rossa는 '빨강'이라는 뜻이다. 이 과일은 시칠리아에서만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가 이 과일을 최초로 맛 본 것은 로마의 한인숙소에 머물때였다.

부활절 연휴를 맞아 독일에서 로마를 찾은 한국인 가족들이 다시 독일로 돌아가면서 숙소에 남겨두고 간 것이 바로 아란치아 로사였다. 이를 숙소 주인 아주머니가 식사 후 디저트로 내오면서 그 맛을 경험하게 된 것인데 제법 비싼 과일이었음에도 과감히 숙소에 기증한 그 가족들과 이를 아낌없이 디저트로 내준 주인 아주머니에게 먼저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다.

아란치아 로사의 영어 이름은 'Blood Orange'다. 겉은 일반 오렌지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칼로 반을 썰어내면 정말로 피를 연상케 하는 검붉은 과육이 알알이 박혀 있다. 물론 이때 흘러내리는 과즙도 제법 붉다.

처음엔 그 빛깔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는데 피자두를 제외하고 그렇게 검붉은 색을 띄는 과일을 접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피'를 연상케 하는 느낌이 어쩐지 친숙한 오렌지와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 로마 숙소에서 제공된 '아란치아 로사'의 모습. 왼쪽 아래에 있는 '녀석'을 보면 알겠지만 껍질과 과육의 분리가 아주 쉽다. 오른쪽은 상자에 담긴 모습. 

맛은 어떨까? 당시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함께 숙소에 머물던 다른 여행자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어서 흰 접시에 먹기 좋게 벗겨져 나온 '로사'를 슬쩍 보곤 '오렌지가 나왔군.. 붉은 색이네.. 독특하군' 하는 정도로 우리는, 적어도 김군은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 씹으니.. 헉!.. 잠시 만화 '초밥왕'의 그 유치찬란한 은유와 과장을 빌리자면, '처음 씹을 땐 키위즙이 질긴 고기를 부드럽게 하듯 혀가 살살 풀어지더니 이내 은하수의 별들이 땅으로 쏟아져 내리듯 반짝이는 느낌이 스치고 급기야 톡톡 알알이 과육이 터질 때는 마치 이과수 폭포의 소용돌이가 입안을 휘몰아치는 느낌으로 절정을 맞는다. 그리고 한 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젖은 대지를 말리는 간지러운 바람이 마지막을 장식하는 맛' 이라고나 할까? ^^

아란치아 로사는 아주 잘 익은 오렌지의 달콤함에 열대 과일만이 갖는 독특한 청량감과 향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흔히 먹는 캘리포니아산 오렌지나 칠레산 오렌지와 비교할 때 껍질도 제법 부드럽게 잘 벗겨지는 편이어서 먹기가 아주 편하고 질긴 오렌지 껍질을 벗길 때 마다 손에 흥건히 묻어나는 즙도 거의 없는 편이다.

아란치아 로사에 관한 정보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여기저기 뒤져봤으나 자세한 정보가 별로 없다. 우리가 시칠리아를 가야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긴 셈이다. 일반 오렌지의 상큼함에 더해 분명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해주는 아란치아 로사는 에미레이트 항공의 기내식 과일로 제공되고 있다고도 하니 나름 고급으로 인정받는 과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문득 든 생각은 '만약 제주도에서 '로사' 재배에 성공한다면 돈방석은 시간문제겠다'는 것. 관심있는 사람은 도전해보길.. 우선 씨앗부터 빼내야 할텐데 시칠리아 마피아 '코사 노스트라'가 오렌지 농사에 손댔다는 얘기는 아직 없으나 혹시 주요 간부의 부인이 제주도산 '로사'때문에 재미를 못본다고 남편에게 푸념하면.. 제주도에서 우지 기관총을 보는 날도 올 수 있겠다.

로마에서 맛 본 이후 한동안 맛을 못보다가 최근 수퍼마켓에서 아란치아 로사를 발견했다. 바로 냉장고의 음료코너에서다. 같은 오렌지라도 맛을 본 이상 이왕이면 아란치아 로사를 사는 것이 지금으로선 당연한 선택. 하지만 포장을 보니 뭔가 빠져있다. 옆에 진열된 오렌지 쥬스에는 '100%'라는 원액 함량 표시가 적혀있는데 반해 아란치아 로사는 그런 표식이 어딜 봐도 없다.

이후 가까스로 찾아낸 설명에는 아주 작은 글씨체로 'Arancia Rossa 25%'라 적혀 있다. 물 석 잔에 아란치아 로사 1잔을 희석시켰으니 과연 느낌이라도 날까 싶다. 꼴꼴꼴 잔에 따라 낸 로사의 색감을 보라. 75%의 빈자리를 메꾸는데 동원된 인공색소의 은은한 천박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물론 그대들로선 이 천박한 색감의 음료라도 한 잔 맛보고 싶겠지만.. 낄낄

시칠리아로 오라, 그리고 지중해의 품에서 태양이 키워낸 붉은 과일 '아란치아 로사'로 입안을 흥건히 적셔보라.



>> '가루쥬스' 아란치아 로사의 모습. 국내 정보에선 아란치아 로사의 사진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외국 사이트에서 한 장 겨우 건진 사진도 어째 좀 땟깔이 후지다. 몰타와 시칠리아는 배로 2시간 거리에 불과하지만 몰타에서도 아란치아 로사를 구경하기는 쉽지 않다.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