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12.29 이제 사람사는 집 같네.. 6
  2. 2008.12.26 엘리자베따가 온다, 짐과 함께.

정확히 아침 8시 10분이면 발코니로 나가는 유리문을 통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온 햇빛이 침대 머리맡 흰 벽을 붉게 물들인다. 자다가 깨서 고개만 까딱 세우면 그 햇빛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데 어제 아침엔 9시가 다 되가는데도 햇빛이 비추지 않았다. '날씨가 흐린게로군'하며 슬리퍼를 주섬주섬 신고 문쪽으로 다가가니 그제서야 눈이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불현듯 든 생각이 '비는 소리가 나지만 눈은 소리가 안난다'는 것.

그리고 보니 유럽에 와서 처음으로 맞는 눈이다. 함박눈 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의 눈이 펑펑 쏟아졌고 지붕위에도, 빨래줄 위에도 내려앉았다. 눈을 바라보는 눈이 시원해졌고 내친김에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오늘은 첫눈 소식 못지않게 특별한 날이다. 베로나의 우리 짐을 싣고 엘리자베따가 뻬루자에 오는 날이기 때문. 앞서 얘기했다시피 이로써 20만원에 이르는 교통비를 아끼게 됐고 또한 생활에 필요한 온갖 물건들을 편하게 앉아서 받게 됐으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엘리가 오후 늦게쯤에나 도착할까 싶어 아침일찍 기차로 1시간이 채 안걸리는남쪽의 시골마을 트레비(Trevi)에서 매달 마지막 일요일에 열린다는 골동품 시장을 구경하려 했는데 12시쯤에 도착한다고 해 이 일정은 취소했다. 눈도 오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다.

맘만 먹으면 차를 집앞 골목까지 끌고들어올 수 있겠지만 들어오는 길과 달리 나가는 길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나가는지를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우리가 종종 이용하는 광장 근처의 수퍼마켓 앞에서 보기로 했다. 뻬루자는 좁은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곳이어서 지도가 없으면 길 잃기 딱 좋고 있어도 길 찾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매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된다. 왜냐면 골목길이 하나같이 멋지기 때문.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게 이곳의 골목길이다. 특히 안개라도 끼면 그야말로 죽음이다.

이런.. 엘리가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 비상등을 켠 차에 다가가니 엘리가 그제서야 알아보고 차문을 열고 반갑게 우릴 맞는다. '차오~ 쪽쪽!' 이탈리아는 두 번에 걸쳐 양쪽에 볼키스를 하는 것이 인사법. 무거운 짐을 차에 싣는게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 싣고 왔다. 뻬루자는 20년 만에 처음 방문이라는 엘리, 그녀는 이곳 호텔을 예약했고 크리스마스 첫 주서부터 연말 휴가중인 그녀는 뻬루자에 이틀 정도 머물 예정이다. 당연히 이날 저녁은 우리집에서 먹어야 한다. 해서 김군은 이미 전날 육계장을 한 솥 끓여놨다. 고기와 무를 제외하고 주요 건더기들이 많이 빠졌지만 그래도 맛은 제법 난다.  


차에서 내리며 외투를 서둘러 걸치는 엘리자베따. 차문을 열어놨길래 쿵 하고 닫아줬더니 키 꽂은 채로 문을 닫아두면 얼마후 자동으로 문이 잠겨버리는 낭패가 생긴다나.. 한쪽 문은 열어뒀다.

저녁 7시에 광장에서 만나 먼저 아페리띠보 한 잔 하기로 하고 헤어진 뒤 짐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헌데 이미 며칠 째 살고 있는 집이지만 온갖 살림을 담은 짐을 끌고 들어서니 왠지 이제서야 진짜 살 집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꽁꽁 닫아둔 짐을 풀어내니 좁은 주방겸 거실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휴지도 나오고 잘 싸둔 칼도 나오고 겹겹이 포장한 간장과 식초도 나온다. 여벌의 옷들과 책, 특히 귀 후비는 면봉을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샤워하고 난 뒤 물기로 간질거니는 귀를 닦고 싶어 어찌나 쩔쩔 맸는지..ㅋㅋ 텅텅 빈 집안의 수납장에 살림을 쟁여넣고 빈책장을 책으로 채웠다. 다시 걸레를 들고 미처 닦지 못한 곳을 구석구석 신나게 닦아내니 비록 당분간이지만 '이제 우리집이다'하는 실감이 든다.


보기엔 저래도 상당히 많은 짐. 무게도 꽤 나가서 짧은 거리를 지고 끌고 오는데도 땀이 다 났다.

집 구경 잠시 해볼까?

거실겸 주방. 몰타의 주방만 저거 딱 두 배였다. 그래도 전자렌지를 제외하고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으니 딱히 아쉬운건 없다. 앞집과 창문을 마주하고 있어 얇은 머플러를 응급으로 둘러쳐놨다. 가끔 대머리 총각이 창문을 열고 빨래는 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제법 넓직한 화장실겸 욕실. 창문을 갖추고 있어 불쾌한 냄새나 습기를 쉽게 뺄 수 있다는 점이 장점.

화장실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제법 고풍스럽다. 달리 생각하면 저 수많은 창문에서 우리집 화장실을 훔쳐볼 수도 있다는 얘기. 허나 밤이 되서 불켜지는 창문은 고작해야 2개 정도. 많은 집들이 비어있다. 3층으로 구성되어 총 4가구가 살 수 있는 우리집 건물도 지금은 달랑 우리만 살고 있다. 뻬루자가 정상을 향해 계단식으로 지어진 도시인 탓에 우리집의 2층 높이가 저 앞집에선 1층이 된다.

김군의 '집무실'로 불리는 건넛방. 옷장, 책장, 책상을 두루 갖췄음은 물론 하얀 레이스가 달린 창문도 있는 아담한 방이다. 여기에 한국인 민박을 쳐볼까 진지하게 고민중 ㅋㅋ. 한국에서 가족이나 지인들이 오면 제공할 방이기도 하다. 그럴듯해 보이는 침대지만 스프링 탄력이 고무줄 같아서 허리 안좋은 사람은 작살날 수 있는 무서운 침대. 책상 위에 뜯지않은 빠네또네가 놓여있다. 크리스마스 끝나자마자 1.5유로라는 놀라운 가격으로 대폭 떨어졌길래 냉큼 하나 사왔다. 살 빵빵 찌고있다. 


이른바 안방. 커다란 옷장도 두 개나 있고 책상과 책장도 저처럼 구성지게(?) 갖춰져 있다. 싱글침대 두 개를 붙여 쓰는데 사진에 안나온 왼쪽 구석탱이에 난방기가 있어 강양은 그쪽에 꼭 붙어 잔다. 집이 전반적으로 추운편이지만 마침 베로나에 있던 전기장판도 왔으니 이제 김군도 좀 따끈하게 잘 수 있게 됐다. 밝은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발코니. 자면서 별도 볼 수 있고 저 멀리 아씨지의 아른거리는 불빛도 볼 수 있다는 점이 이 방의 강점.

미처 사진으로 담지 못했지만 엘리자베따를 위해 육계장에 더해 비빔밥을 만들었다. 시금치와 호박, 당근, 버섯을 볶고 색색의 계란지단도 부쳐냈고 무생채도 곁들였다. 색색의 그 모양이 꽤나 신기하게 보였을텐데 아니나 다를까 감탄 연발이다. 매운 맛을 두려워하는 그녀지만 참기른 살짝 둘러 비벼줬더니 맛있다며 잘 먹는다. 특히 육계장은 칼칼한 맛에도 불구하고 고기국물의 깊은 맛이 이탈리아에서 또르뗄리니를 넣고 즐기는 브로도(Brodo)와 흡사하다며 싹싹 비운다. 브로도는 이탈리아의 육수다.

중국상점에서 마침 두부를 팔길래 3모(한 모에 1,300원 정도)를 사둔게 있어 이걸 팬에 튀기고 다시 양념장을 만들어 자작하게 붓고 조렸다. 엘리는 평소 '두부는 '무미(無味)'한 맛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맛있다'며 덥썩덥썩 잘 집어먹는다. 간장양념의 맛에 엘리도 이제 조금씩 중독이 돼가고 있으리라. 팩소주가 하나 있어 이왕 벌어진 한국밥상, 팩소주를 하나 깠다. 차갑게 식혀놨더니 한 잔 맛을 본 엘리는 별로 쎄지 않단다. 차가우니 당연하지. 먼길을 마다않고 와준 엘리에게 보답한 오늘의 식탁, 사실 그간의 도움을 떠올리면 이것도 부족하지 싶다. 우래옥표 불고기를 한 번 먹여봐야 할텐데..

Posted by dalgonaa
어제 크리스마스, 하루종일 부슬비가 내리고 바람이 제법 불었다. 춥고 비오니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하루종일 집에 머물며 호박전 부쳐먹고 지직 거리는 텔레비전을 보며 그분 오신 하루를 보냈다. 뻬루자에 집도 마련했고 크리스마스도 이제 끝났으니 베로나의 엘리자베따 집에 맡겨놓은 덩치 큰 짐들을 찾아와야 한다. 어른 두 사람이 끌고 짊어지고 각 손에 들어야하는 제법 많은 짐이다. 중요한 내용물들은 사실 이 짐들속에 다 있다. 카메라는 물론 하다못해 고추장, 간장도.

헌데 뻬루자에서 베로나를 가려면 피렌체와 볼로냐에서 각각 열차를 갈아타야 하고 가는데만 무려 6시간에 이르는 엄청난 여정이다. 기차요금만도 두 사람이 왕복하면 100유로에 이르니 우리돈으로 치면 무려 18만원에 이르는 큰 돈. 직선거리로 300km도 안나오는 거리, 돌고 돌아도 기껏해야 서울에서 경주 정도 가는 거리인데 6시간의 여정과 18만원의 왕복요금은 여간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뭔가 새로운 일 때문에 가는 거면야 이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겠지만 단지 짐을 찾아오기 위해, 차 한 잔 마실 시간 없이 서둘러 짐을 챙겨들고 오는데 이 노력과 돈을 들인다 생각하니 아깝다는 얄궂은 심술만 커졌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엘리가 자신의 아우디 승용차로 뻬루자까지 짐을 가져다주는 것인데 그건 우리의 지나친 욕심이고 적어도 피렌체까지만 갖고 내려와 주면 뻬루자에서 피렌체까지 기차요금이 9유로가 안되니 두 사람 왕복요금 36유로만으로 짐을 찾아올 수 있다. 허나 엘리가 피렌체를 오는 날은 1월 8일에나 가능하다는데 그때까지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다. 해서 어제는 이탈리아 기차 노선과 시간을 뒤지며 묘안을 찾아봤지만 뾰족한 수는 찾지 못했고 결국 내일이나 월요일 쯤에 아침 7시 22분 기차를 타고 베로나로 짐 가지러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근데 오늘 아침, 엘리로부터 메일이 왔다. 내일 시에나에 올 예정인데 시에나에서 하루 머물고 다음날인 일요일에 뻬루자를 오겠다는 것이다. 물론 짐을 가지고. 여간 반가운게 아니다. 시간과 교통비 절약은 물론 그 무거운 짐을 이끌고 버스와 기차를 오르내리지 않아도 된다니 다행이다. 다만 엘리가 짐을 차에 실을 때 고생이겠지만 집안 일을 봐주는 아주머니와 합심해서 하면 된다고 하니 아무튼 고맙다.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기분이다 싶어 서점에서 50유로를 주고 커다란 이탈리아 사진책을 구입했는데 이번 일로 그런 멋진 책을 두 권을 더 살 수 있는 생각에 더 즐겁다. (물론 굳은 교통비로 추가로 책을 사진 않겠지만..)

다만 사소한 문제가 있다. 어쩌면 엘리가 우리 집에서 일요일 하루 묵을지 모른다는데 현재 남는 방에 침대는 있으나 시트나 이불이 없기 때문이다. 몰타에서 공부를 마치고 새해초에 우리집에 올 예전 플랫메이트 지희를 위해 조만간 이것들을 준비해둬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장 엘리가 온다니 서둘러야겠다. 사실 이 집이 구조상으로도, 위치상으로도 모두 훌륭하긴 하지만 집이 좀 춥다. 난방도 가스비가 비싸다는 부동산 말에 잔뜩 움추러들어 화끈하게 돌리지도 않는 상황이다. 벽난로나 난로를 갖추고 장작을 때 난방을 하는 주변 이웃들이 여간 부러운게 아닌데 엘리 오는날 만큼은 난방비 걱정 잠시 끄고 온도 팍팍 올려야겠다. 그나저나 엘리는 최근 전남 편인 엔리코와의 재결합을 위해 노력 많이 했는데 엔리코가 어떤 답을 줬을지 궁금하다. 그녀는 요 며칠 전 엔리코에게 '너의 확실한 입장을 듣고 싶다'고 전했단다. 혹시 비보를 접한 엘리가 잠시 베로나를 벗어나고자 뻬루자 행을 결심한 건 아닐까? 우리의 짐을 고행삼아?  음.. 그러면 안되는데..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