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4.25 시칠리아의 태양을 담아낸 과일, '아란치아 로사' 5
아란치아 로사(Arancia Rossa)라는 '어륀지'가 있다. Arancia는 이태리어로 '오렌지'란 뜻이고 Rossa는 '빨강'이라는 뜻이다. 이 과일은 시칠리아에서만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가 이 과일을 최초로 맛 본 것은 로마의 한인숙소에 머물때였다.

부활절 연휴를 맞아 독일에서 로마를 찾은 한국인 가족들이 다시 독일로 돌아가면서 숙소에 남겨두고 간 것이 바로 아란치아 로사였다. 이를 숙소 주인 아주머니가 식사 후 디저트로 내오면서 그 맛을 경험하게 된 것인데 제법 비싼 과일이었음에도 과감히 숙소에 기증한 그 가족들과 이를 아낌없이 디저트로 내준 주인 아주머니에게 먼저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다.

아란치아 로사의 영어 이름은 'Blood Orange'다. 겉은 일반 오렌지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칼로 반을 썰어내면 정말로 피를 연상케 하는 검붉은 과육이 알알이 박혀 있다. 물론 이때 흘러내리는 과즙도 제법 붉다.

처음엔 그 빛깔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는데 피자두를 제외하고 그렇게 검붉은 색을 띄는 과일을 접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피'를 연상케 하는 느낌이 어쩐지 친숙한 오렌지와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 로마 숙소에서 제공된 '아란치아 로사'의 모습. 왼쪽 아래에 있는 '녀석'을 보면 알겠지만 껍질과 과육의 분리가 아주 쉽다. 오른쪽은 상자에 담긴 모습. 

맛은 어떨까? 당시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함께 숙소에 머물던 다른 여행자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어서 흰 접시에 먹기 좋게 벗겨져 나온 '로사'를 슬쩍 보곤 '오렌지가 나왔군.. 붉은 색이네.. 독특하군' 하는 정도로 우리는, 적어도 김군은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 씹으니.. 헉!.. 잠시 만화 '초밥왕'의 그 유치찬란한 은유와 과장을 빌리자면, '처음 씹을 땐 키위즙이 질긴 고기를 부드럽게 하듯 혀가 살살 풀어지더니 이내 은하수의 별들이 땅으로 쏟아져 내리듯 반짝이는 느낌이 스치고 급기야 톡톡 알알이 과육이 터질 때는 마치 이과수 폭포의 소용돌이가 입안을 휘몰아치는 느낌으로 절정을 맞는다. 그리고 한 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젖은 대지를 말리는 간지러운 바람이 마지막을 장식하는 맛' 이라고나 할까? ^^

아란치아 로사는 아주 잘 익은 오렌지의 달콤함에 열대 과일만이 갖는 독특한 청량감과 향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흔히 먹는 캘리포니아산 오렌지나 칠레산 오렌지와 비교할 때 껍질도 제법 부드럽게 잘 벗겨지는 편이어서 먹기가 아주 편하고 질긴 오렌지 껍질을 벗길 때 마다 손에 흥건히 묻어나는 즙도 거의 없는 편이다.

아란치아 로사에 관한 정보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여기저기 뒤져봤으나 자세한 정보가 별로 없다. 우리가 시칠리아를 가야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긴 셈이다. 일반 오렌지의 상큼함에 더해 분명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해주는 아란치아 로사는 에미레이트 항공의 기내식 과일로 제공되고 있다고도 하니 나름 고급으로 인정받는 과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문득 든 생각은 '만약 제주도에서 '로사' 재배에 성공한다면 돈방석은 시간문제겠다'는 것. 관심있는 사람은 도전해보길.. 우선 씨앗부터 빼내야 할텐데 시칠리아 마피아 '코사 노스트라'가 오렌지 농사에 손댔다는 얘기는 아직 없으나 혹시 주요 간부의 부인이 제주도산 '로사'때문에 재미를 못본다고 남편에게 푸념하면.. 제주도에서 우지 기관총을 보는 날도 올 수 있겠다.

로마에서 맛 본 이후 한동안 맛을 못보다가 최근 수퍼마켓에서 아란치아 로사를 발견했다. 바로 냉장고의 음료코너에서다. 같은 오렌지라도 맛을 본 이상 이왕이면 아란치아 로사를 사는 것이 지금으로선 당연한 선택. 하지만 포장을 보니 뭔가 빠져있다. 옆에 진열된 오렌지 쥬스에는 '100%'라는 원액 함량 표시가 적혀있는데 반해 아란치아 로사는 그런 표식이 어딜 봐도 없다.

이후 가까스로 찾아낸 설명에는 아주 작은 글씨체로 'Arancia Rossa 25%'라 적혀 있다. 물 석 잔에 아란치아 로사 1잔을 희석시켰으니 과연 느낌이라도 날까 싶다. 꼴꼴꼴 잔에 따라 낸 로사의 색감을 보라. 75%의 빈자리를 메꾸는데 동원된 인공색소의 은은한 천박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물론 그대들로선 이 천박한 색감의 음료라도 한 잔 맛보고 싶겠지만.. 낄낄

시칠리아로 오라, 그리고 지중해의 품에서 태양이 키워낸 붉은 과일 '아란치아 로사'로 입안을 흥건히 적셔보라.



>> '가루쥬스' 아란치아 로사의 모습. 국내 정보에선 아란치아 로사의 사진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외국 사이트에서 한 장 겨우 건진 사진도 어째 좀 땟깔이 후지다. 몰타와 시칠리아는 배로 2시간 거리에 불과하지만 몰타에서도 아란치아 로사를 구경하기는 쉽지 않다.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