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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26 엘리자베따가 온다, 짐과 함께.
어제 크리스마스, 하루종일 부슬비가 내리고 바람이 제법 불었다. 춥고 비오니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하루종일 집에 머물며 호박전 부쳐먹고 지직 거리는 텔레비전을 보며 그분 오신 하루를 보냈다. 뻬루자에 집도 마련했고 크리스마스도 이제 끝났으니 베로나의 엘리자베따 집에 맡겨놓은 덩치 큰 짐들을 찾아와야 한다. 어른 두 사람이 끌고 짊어지고 각 손에 들어야하는 제법 많은 짐이다. 중요한 내용물들은 사실 이 짐들속에 다 있다. 카메라는 물론 하다못해 고추장, 간장도.

헌데 뻬루자에서 베로나를 가려면 피렌체와 볼로냐에서 각각 열차를 갈아타야 하고 가는데만 무려 6시간에 이르는 엄청난 여정이다. 기차요금만도 두 사람이 왕복하면 100유로에 이르니 우리돈으로 치면 무려 18만원에 이르는 큰 돈. 직선거리로 300km도 안나오는 거리, 돌고 돌아도 기껏해야 서울에서 경주 정도 가는 거리인데 6시간의 여정과 18만원의 왕복요금은 여간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뭔가 새로운 일 때문에 가는 거면야 이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겠지만 단지 짐을 찾아오기 위해, 차 한 잔 마실 시간 없이 서둘러 짐을 챙겨들고 오는데 이 노력과 돈을 들인다 생각하니 아깝다는 얄궂은 심술만 커졌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엘리가 자신의 아우디 승용차로 뻬루자까지 짐을 가져다주는 것인데 그건 우리의 지나친 욕심이고 적어도 피렌체까지만 갖고 내려와 주면 뻬루자에서 피렌체까지 기차요금이 9유로가 안되니 두 사람 왕복요금 36유로만으로 짐을 찾아올 수 있다. 허나 엘리가 피렌체를 오는 날은 1월 8일에나 가능하다는데 그때까지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다. 해서 어제는 이탈리아 기차 노선과 시간을 뒤지며 묘안을 찾아봤지만 뾰족한 수는 찾지 못했고 결국 내일이나 월요일 쯤에 아침 7시 22분 기차를 타고 베로나로 짐 가지러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근데 오늘 아침, 엘리로부터 메일이 왔다. 내일 시에나에 올 예정인데 시에나에서 하루 머물고 다음날인 일요일에 뻬루자를 오겠다는 것이다. 물론 짐을 가지고. 여간 반가운게 아니다. 시간과 교통비 절약은 물론 그 무거운 짐을 이끌고 버스와 기차를 오르내리지 않아도 된다니 다행이다. 다만 엘리가 짐을 차에 실을 때 고생이겠지만 집안 일을 봐주는 아주머니와 합심해서 하면 된다고 하니 아무튼 고맙다.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기분이다 싶어 서점에서 50유로를 주고 커다란 이탈리아 사진책을 구입했는데 이번 일로 그런 멋진 책을 두 권을 더 살 수 있는 생각에 더 즐겁다. (물론 굳은 교통비로 추가로 책을 사진 않겠지만..)

다만 사소한 문제가 있다. 어쩌면 엘리가 우리 집에서 일요일 하루 묵을지 모른다는데 현재 남는 방에 침대는 있으나 시트나 이불이 없기 때문이다. 몰타에서 공부를 마치고 새해초에 우리집에 올 예전 플랫메이트 지희를 위해 조만간 이것들을 준비해둬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장 엘리가 온다니 서둘러야겠다. 사실 이 집이 구조상으로도, 위치상으로도 모두 훌륭하긴 하지만 집이 좀 춥다. 난방도 가스비가 비싸다는 부동산 말에 잔뜩 움추러들어 화끈하게 돌리지도 않는 상황이다. 벽난로나 난로를 갖추고 장작을 때 난방을 하는 주변 이웃들이 여간 부러운게 아닌데 엘리 오는날 만큼은 난방비 걱정 잠시 끄고 온도 팍팍 올려야겠다. 그나저나 엘리는 최근 전남 편인 엔리코와의 재결합을 위해 노력 많이 했는데 엔리코가 어떤 답을 줬을지 궁금하다. 그녀는 요 며칠 전 엔리코에게 '너의 확실한 입장을 듣고 싶다'고 전했단다. 혹시 비보를 접한 엘리가 잠시 베로나를 벗어나고자 뻬루자 행을 결심한 건 아닐까? 우리의 짐을 고행삼아?  음.. 그러면 안되는데..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