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니탈리 둘째 날인 금요일, 엘리자베따가 베르가모의 친구들을 긴급 소집했다. 곧 떠나는 우리를 위해 한 번 거하게 먹고 헤어지자 해서 며칠 전 미리 잡은 약속 것인데 그 날이 바로 이날이었던 것. 베르가모의 친구들이란 엘리자베따와 전남편인 엔리코가 한 때 베르가모에 살던 시절에 만나게 된 친구들로 이들 부부(지금은 아니지만)의 인연이 우리에게까지 연결됐던 것. 지난 연말 베르가모 시내 한곳에 위치한 줄리오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들은 늘상 먹어오던 저녁식탁에 좀 더 수고와 정성을 얹어 낸 음식을 준비해놨다. 또 다른 낯선 문화의 방문을 열고 들어서게 해준 이들의 음식에서 각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으니 그 보답은 맛있게 먹는 것. 이후 우리의 여행이야기와 이들의 사는 이야기가 뒤섞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그 추억이 각자 남달라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뭉치자 마련된 자리다.


리스또란떼 치까렐리는 베로나 시내에서 한참 벗어난 동네에 위치한 식당이다. 우리로 치면 국도변에 위치한 유서깊은 맛집과 같은 셈인데 맛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서 베로나는 물론 이번처럼 멀리 베르가모에서도 손님들이 밀려온다. 이날도 줄리오 일행은 식사중에 동네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으니.. 그나저나 저 '치까렐리'가 당최 무슨 뜻일지 모르겠다. 갖고 있는 사전이 워낙 후져서 단어 조차 없다. 줄리오가 틈틈이 우리 블로그를 체크한다는데 그가 이 대목을 봐주길 바라며 좀 물어봐야 겠다.

Hi~ Giulio, we hope you see this sentense.  What does 'Ciccarelli' mean?
답을 기다려보자.


베르가마스코(베르가모 사람)들이 도착했다. 왼쪽이 줄리오, 맨 오른쪽이 마리오와 그의 부인 까를라. 가죽자켓을 입은 이유는 평소 오토바이를 즐기기 때문. 마르코는 무역업이 직업이고 까를라는 전업주부이지만 그녀의 요리솜씨는 수준급이라고 한다. 해서 한 때 까를라로부터 요리수업을 받아보려 했으나 이래저래 사정으로 미뤄져 결국 오늘에 이르고 말았으니.. 우리도 안타깝지만 까를라도 몹시 안타까운 눈치. 왼쪽에 동글동글한 아저씨가 바로 줄리오.


자리를 잡고 앉은 뒤 곧 이들을 위해 준비한 기념품을 풀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탄성에 기분이 우쭐, 흐믓, 뿌듯. 이 맛에 선물을 주나보다. 선물은 운전석 룸미러에 걸면 딱 좋을 작은 비단 버선. 아기자기한 디자인과 비단의 강렬한 색감에 모두 탄성을 자아낸다. 이럴 때 마다 '좀 더 근사한 걸로 신경 좀 쓸껄' 하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식당에 왔으니 뭐하겠나? 먹어야지. 뭘 어떻게 먹으란 얘긴가 싶은 파스타가 나왔다. 저 파스타의 이름은 '딸리아뗄레'. 생면 파스타이고 면의 우리의 칼국수, 혹은 모밀면의 형태와 비슷해 퍽 익숙하다. 면의 폭이 좀 더 좁아지면 '딸리올리니'라는 이름을 둔갑하고 저거보다 폭이 좀 더 넓어지면 페투치네, 그보다 넓어지면 '빠빠르델라'가 된다. 하여튼 이탈리아 파스타란.. 위에 얹어진 것은 버터를 숟가락으로 긁듯이 떠서 얹어 놓은 것. 저걸 그냥 먹으면 되는거냐고? 천만에. 


 
보이는 것은 라구소스. 바로 우리가 머물고 있는 볼로냐가 저 라구소스의 발상지라고. 갈은 돼지고기와 쇠고기, 버터, 토마토, 샐러리, 당근, 양파, 빠르미자노 치즈, 레드와인 등을 때려넣고 3시간 이상 뭉근이 졸여낸 소스다. 소스 위에 맑은 국물이 바로 버터를 비롯한 기름의 총체이니 체중조절에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섣불리 달려들기 주저되는 음식. 북부식 요리의 특징이 바로 이 라구소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칼로리땜에 멀리하고 싶어도 맛은 좋으니 어쩌랴,  한국자 푹 떠서 딸리아뗄레 위에 얹어 비벼먹으면 그게 바로 정통 볼로네제 파스타 되겠다. 볼로냐 식당에서 볼로네제 파스타를 시키면 위에서처럼 면과 소스를 따로 내준다는 얘기. 정통 볼로냐식을 베로나에서 맛 볼 줄이야.. 우리네 짜장면, 정확히는 간짜장과 비슷한 방식이니 좀 놀랍다.



이 식당이 재밌는건 단지 라구소스만이 아니라 두 가지 곁들임 소스(?)를 함께 제공한다는 점이다. 요거 참 맘에 드는데 사진의 주인공은 간 볶음. 역시 토마토 소스에 푹 익혀낸 요리(?), 혹은 소스다. 테이블에 둘러 앉은 사람들과 먹을 만큼 사이좋게 자기 딸리아뗄레에 얹으면 그만. 하나 집어 맛보니 소스 때문인지 오랜 조리때문인지 간 특유의 진한 풍미가 조금 떨어지지만 부담없이 먹기 좋다.


계속 시뻘건 소스들. 이건 토마토다. 오랜시간 뭉근히 끓여 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지만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지 토마토의 풍미가 제법 진하다. 추측컨데 설탕이리라. 라구 소스도 좋았지만 얕봤던 토마토 소스의 맛을 보고 살짝 감동해 요놈만 주로 넣어 비벼먹었다. 이 역시 버터에 볶아 풍미는 좋지만 어우.. 맛좋다고 이런 식으로 며칠만 먹어대면 뱃살 불어나는건 일도 아니겠다는..

프라이팬에 열심히 볶아대는 것만 보고 먹어오던 것에서 이처럼 우리네 간짜장마냥 취향껏 소스를 비벼먹으니 이 또한 편리하고 먹는 재미가 좋다.  생면 파스타는 포크질 보다는 젓가락질이 먹기에 훨씬 유리하다는 생각인데 건면 파스타가 일정한 길이가 포크에 알맞게 말리는 것에 비해 생면 파스타는 반죽을 민 크기에 따라 결정되고 따라서 접은 반죽을 칼로 잘라 풀어내면 대개 긴 면이 나온다. 우리네 칼국수처럼.  따라서 포크로 말다보면 한 접시 모든 면이 말릴 수도 있다. 파스타 요령 많이 늘었네 그려.. 


파스타를 먹고 나자 채소 삶은 것들이 나왔는데 아마도 콘또르노(Contoron-'밑반찬'이라고 사전은 해석) 였을 듯.  이탈리아 요리에 대한 기대가 여지없이 깨져나가는 예가 종종 있는데 이 경우가 바로 그렇다. 당근, 컬리플라워, 사진에서 보이는 피노끼오(펜넬) 등을 그냥 삶아서 접시에 내왔다. 올리브유를 곁들여 먹어도 나름 괜찮긴 하지만 요리라고 볼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 가정식의 범주에서 평가하자면 그 투박함이 좋긴 하지만 돈내고, 그것도 제법 비싸게 내고 먹는 요리에서 이런 음식을 접하게 되면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피노끼오는 올리브유와 발사믹 초에 날거대로 찍어먹는게 훨 맛있단 말이다~


깡통콩에 찐감자. 오 노..



잠시 중세를 지나나 싶었는데 엥? 구석기로 돌아갔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세꼰도(육류나 생선) 요리의 등장. 돼지와 오리로 구성된 고기를 절반은 오븐에 구웠고 절반을 쪘단다. 독특한 부위는 돼지 혀와 껍데기. 껍데기는 탱글탱글함과 부들부들함이 도가니를 연상시켰는데 별다른 양념 없이 소금만 살짝 뿌려 먹어도 쫄깃하면서 맛이 좋다. 이탈리아 친구들이 초간장에 찍어먹는 맛을 안다면 돼지껍데기 없어서 못먹을텐데.. 일전에 회사 동료와 함께 점심을 먹곤 회사가 아닌 종묘공원으로 발길을 돌려 한 포장마차에서 3천원짜리 돼지껍데기 무침에 막걸리를 마신 적이 있다. 그때 이후로 돼지껍데기 무침(구이 사절) 예찬론자가 됐는데 이날, 그때 와는 또 다른 맛의 변신에 살짝 감동. 저거 마냥 찌면 되는걸까? 그 비법은 베로나의 요리사뿐 아니라 종묘공원 포장마차 아주머니도 알고 계시리라.


아저씨, 골고루 담아주셨다. 맛보기 전인지라 돼지껍데기가 맨 오른쪽에 살짝 낑겨 있는데 진작에 그 맛을 알았다면 가운데에 좀 더 큼직하게 썰어달라고 했을 껄.. 그 위로 순대같은 모양은 돼지 대창에 고기와 도가니 등을 갈아 넣은 것쯤 되지 싶다. 고기와 더불어 쫀쫀한 것이 씹히는 것이 조금 덜 기름졌다면 신의주 찹쌀순대와 그 질감에 있어 차이가 없었을 것 같더라는. 순대 옆으로 껍질 벌건 것이 돼지 혀. 기름기는 전혀 없는 완전한 근육. 살짝 망설이다 다른 사람들 접시 걷어가는 즈음에 조금 잘라 맛을 봤는데 그냥 쫄깃거리는 고기더라는. 흔치 않은 손님이라고 오리 다리도 끼워주시고 암튼 푸짐하게 한 접시다. 우리라면 술국 하나 곁들여서 소주 몇 병 보냈을 조합. 만약 그 맛을 주당인 줄리오가 깨닫는다면 남은 생을 그 맛과 바꿀 것임에 틀림없다. 줄리오는 음식과 술 가운데 놓고 사람들과 먹고 마시고 떠들기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줄리오. 얼굴에 '술'이라고 써있는거 보이나?  직업은 액자 가게 사장님. 덕분에 미술에 대한 안목이 높아진건지 아님 단지 직업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집에는 멋진 작품들이 꽤나 걸려있다.



그의 부인 텐더. 줄리오가 젊었을 때 버마 여행을 갔다가 미장원에서 일하던 텐더를 보고 홀딱 반해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뒤 결국 그녀를 데리고 이탈리아로 건너와 지금까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비니탈리에서 그렇게 마시고 왔는데도 결국 세 병의 와인을 모두 비우는 기염을 토했다. 운전해야 하는 두 사람과 평소 술 많이 안마시는 몇 사람을 빼면 결국 줄리오와 김군이 주거니 받거니 달렸다는 얘기. 사실 추가 1병은 시킬 생각이 없었으나 김군이 까메리에레의 말을 잘못 이해해 덥썩 한 병을 추가하고 만 것. 마실 생각으로 시킨 것이려니 하는 인상을 심어줬으니 적어도 반은 비워야 한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마셨는데 어느새 줄리오도 열심히 따라붙어 결국 저리 비워내고 말았다. ㅋㅋ  



갑자기 우리를 주방으로 안내하는 식당 주인아저씨. 얼씨구나 하고 따라 들어가니 젊은 요리사들은 없고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들이 막 뒷정리들을 하고 계신다. 바로 저 아주머니를 비롯한 다른 분들이 이곳의 요리사다. 유행과 실험을 쫓으며 미쉘린의 별을 바라는 요리사가 아닌 그동안 집에서 해먹던 대로, 손에 길들여진 조리법대로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이 식당의 컨셉인 셈. 그러니 북부의 나름 이름 난 가정식을 맛본 거나 다름없다. 그래도 제법 비싼 식사였는데 그 찐 채소는 좀.. 사실 찐 채소가 문제가 아니라 가격이 비쌌다는 점이 옥의 티다.



디저트 등장. 이태리 사람들이 부활절에 즐겨먹는 꼬롬바 빠스꾸알레(Colomba Pasquale-부활(절)의 비둘기)이라는 케잌(혹은 빵)에서 착안한 디저트로 이름 역시 같다. 요즘 부활절을 앞두고 이태리 전역의 수퍼마켓과 빠스띠체리아(제과점이랄까..)에는 저 '비둘기'가 가득가득 쌓여있는데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풍습인진 모르겠으나 지난 연말 맛있게 먹었던 빠네또네와 여러모로 닮아 그 맛 또한 같을테니 반갑다.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온 꼬롬바 빠스꾸알레의 모습>

부풀어 오른 빵 표면은 소보루 비슷하고 아몬드가 박히고 슈가파우더가 사뿐히 내려앉은 모습. 외형은 좀 달라서 언뜻 보면 뚱뚱한 십자가 모양인데 함께 식사하던 마리오가 말하길 "코롬바를 사면 양 날개를 잘라줘야 한다"고 해서 무슨 소린가 했다. 지금에야 확인해보니 그게 비둘기의 날개를 잘라주라는 의미. 근데 '왜?'까지는 아직 모르겠다. (결국 며칠 전 꼬롬바를 샀고 맛있게 먹어치웠다. 모양을 제외하고 빠네또네와 다른 점은 빵 안에 건포도를 비롯한 다른 부재료가 일체 들어있지 않다는 것)



배부른 만찬 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탈리아의 소화제 '그라빠(Grappa)'. 40도의 독주. 포도로 만들었으니 브랜디로 분류되고 좋은 그라빠는 프랑스의 꼬냑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꼬냑은 오크통에서 숙성을 거치면서 착색이 되지만 그라빠는 오크숙성을 거치지 않아 저렇게 투명하다고. 암튼 저거 한 잔이면 부풀어 오른 배가 쑥 꺼진다. 믿거나 말거나.


식당 주인의 권유로 내려가 본 지하 저장고. 직접 담근 고추 피클은 물론 즐비한 고급 와인에서 식당의 기품을 살짝 엿볼 수 있다. 그래도 달랑 찐 채소는 좀..



기념사진 한 장 찍겠다고 하니 당장 포즈를 잡아주는 까메리에레와 바 맨(BAR Man).


식당을 나와서 저렇게 길가에 서서 한참을 떠들었다. 오랫만의 만남에서 여운이 짧을리 없다. 게다가 당분간, 어쩌면 영영 헤어지는 순간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줄리오와 텐더는 떠나기 전에 베르가모 집에 다시 한 번 오라고 성화다. 그러고 싶지만 과연 사정이 호락호락할지 모르겠다. 밀라노에 갈 이유가 확실히 생긴다면 마침 가까우니 그 핑계로라도 찾아가겠지만 과연 밀라노를 가게 될지.. 이들의 따뜻한 호의를 그냥 묻어버리기가 어쩐지 아깝다.

Posted by dalgonaa

오늘 월요일, 이탈리아 전체가 공휴일이다. 이탈리아 공영 RAI UNO에서 바티칸의 미사 장면을 생으로 때리는걸로 봐선 중요한 종교기일인거 같은데 지금 그거 확인해볼 시간이 없다. 왜냐면 어서 짐을 싸서 엘리자베따네 집에 맡기러 가야 하기 때문. 사실 오늘까지 숙소비를 치뤘고 그래서 오늘 숙소를 나와야 하지만 주인 데이빗이 오늘까지가 그의 여자친구와 연휴를 즐기고 내일 오기때문에 우리는 오늘 안나가고 하루 더 묵을 생각이다. 일종의 도둑 숙박. 내일 아침 7시 엘리자베따(ELISABETTA)와 함께 그녀의 차를 얻어타고 피렌체로 이동할 계획이니 설마 그 꼭두새벽에 데이빗이 청소도구를 들고 나타나진 않겠지.

오늘은 지난 토요일, 밀라노를 조금 못가서 만나는 도시 베르가모(BERGAMO)에서 가졌던 저녁식사 초대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게 꽤 사연이 많은 이야기인지라 지금 안남기면 곧 피렌체, 페루자로 이어지는 여행일정 이야기에 밀려 할 기회가 없을 것 같기 때문. 짐도 싸야하는 강박을 안고 서둘러 적어보자.


Bergamo시내의 모습. 어딜가나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다.

누가 어디서건 집에서 밥 먹여준다면 왠만하면 다 제쳐놓고 챙겨먹자는 우리. 엘리자베따네가 한동안 베르가모에 살때 알게된 친구로부터 모처럼의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고 그 틈에 우리도 초대를 받았으니 토요일 오후 5시, 엔리코가 모는 차를 타고 베로나를 출발했다. 5시가 조금 못미친 시간이었지만 라이트를 켜야할 만큼 이미 어둑어둑했다.

1시간을 조금 넘게 달린 길,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던중 최근 뉴스에 너무 자주 등장하시는 베를루스코니의 근황이 궁금해 물었는데 요지는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SKY라는 위성채널이 이탈리아에서 서비스를 시작했고 근데 이게 부가세를 10%를 내는 반면 베를루스코니가 소유한 MEDIASET(채널이 RAI와 마찬가지로 3개)은 20%를 내고 있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베씨, 고민끝에 SKY의 세금을 올리도록 지시해 이와 관련한 논란이 불붙어 뉴스에 자주 등장한거라고. 부자증세, 서민감세 따위의 논란으로 등장한게 아니라 자신의 주요 밥벌이 문제때문에 등장한 얘긴게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이분, 한국에도 한 사람 있다.

베르가모 구시가지의 어느 건물 앞. 쌀쌀한 날씨와 인적없는 거리에 아랑곳 않고 어떤 남자가 열심히 기타를 뜯고 있다. 주변의 잔잔한 소음도 모두 저 기타소리에 묻혔고 적막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저 자리에 더 머물고 싶었으나 일행이 반대편으로 앞서 가는 바람에 서둘러 사진만 한 장.

아무튼 베르가모에 6시가 좀 넘어 도착했고 우리를 초대한 줄리오(GIULIO)의 집에 가기에 앞서 먼저 베르가모의 구시가지를 살짝 돌아봤다. 걸어서 1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만큼 작은 곳, 세월에 찌든 낡은 건물이 길게 이어졌고 밤에 건물을 올려다 보는 모습은 약간은 기괴스럽지만 좁은 길목에 늘어선 작은 상점에서 새나오는 불빛과 그 안의 모습들, 가령 케익을 팔거나 연말용 선물을 팔거나 하는 모습을 보니 춥고 삭막한 거리가 훈훈해진다. 


음식을 파는 집은 저렇게 유리에 김이 잔뜩 끼었다. 나이든 주인아저씨가 큼직한 치킨을 집어들고 있고 그 뒤로 젊은여자가 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치킨맛은 그래도 한국이..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아페리띠보 한 잔을 위해 작은 BAR에 들렀다. 예닐곱 명의 동네 사람들이 축구와 신문을 보며 한가한 저녁을 맞고 있었는데 이집, 와인 한 잔에 2유로라는 아주 착한 가격과 무엇보다 보꼰치니(Boconcini-한입 군것질꺼리)를 다양하고 넉넉하게 갖추고 있어 이것만으로도 식사가 될 아주 훌륭한 곳이었다. 그래선지 어떤 아줌마, 프로슈또와 치즈를 열심히 가져다 먹었는데 이를 어느새 눈여겨 본 엔리코(ENRICO)도 BAR를 나와 한 마디 하는 말이 "치즈를 아주 삽으로 푸더군".

저 치즈를 강판에 갈면 피자나 파스타에 뿌려먹는 파르마산 치즈가루가 되지만 이탈리아에서 저 치즈를 파르마산 치즈라 부르진 않는다. 파르마산 치즈는 오로지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의 파르마와 레지오에서 생산되는 치즈만을 그렇게 부른다. 물론 가격도 더 비싸다. 허나 우리에겐 저 치즈도 꽤나 맛있었다. 잘 숙성된 파르마산 치즈와 달리 저것은 쫀득한 치감이 있어 숟가락으로 퍼먹어도 좋을 듯 싶었다. 한 통 안고가고 싶게 만든 치즈.


과자, 견과류, 쏘시지 튀긴거, 감자칩, 할라피뇨같은 고추피클, 빵, 프로슈또, 치즈.. 서서 먹는 사람들은 음식을 곁에 두고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비록 와인 한 잔이지만 몸이 살짝 데펴진게 좋다. 다시 차를 타고 높은 곳에 위치한 구시가지를 내려와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차를 세우고 무슨 생각이 발동했는지 아페리띠보를 한 잔 더하자며 인근의 또다른 BAR로 우리를 이끌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우리나라라면 복권이나 팔아야 할 작은 BAR다. 바텐과 손님의 공간이 정확히 50대 50을 차지한 구조. 허나 그 안에선 이미 왁자한 잔치가 벌어졌다. 엔리코가 들어서니 한층 소음이 커졌는데 주인은 물론 손님 몇몇 과도 잘 아는 사이인지 요란하게 악수를 나누고 포옹을 하고, 아무튼 우리는 눈이 둥그레져 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물론 엘리자베따도 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지만 BAR가 좁아 길을 통과할 수 없어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여기서도 와인 한 잔씩을 더 마시고 주인이 특별히 만들어준 보꼰치노, 샐러리에 고르곤졸라 치즈를 얹은 안주를 맛있게 먹어치웠다. 앞서에 이어 두 번째이니 이러다 저녁을 과연 먹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엔리코에게 반갑게 악수를 청하는 바텐더. 이 BAR는 술도 팔지만 복권도 판다. 한마디로 동네 사랑방이다.

갈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이탈리아의 BAR 문화는 정말이지 우리나라에도 수입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일부는 앉아서, 일부는 서서 비교적 저렴하다 할 커피나 아페리띠보, 또는 와인을 한 잔씩 마시며 짧게는 5분, 길게는 그보다 훨씬 더 이상으로 시간을 보내곤 하지만 운영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장사가 된다. 우리로 치면 '딱 한 잔만 더' 개념이 바로 이곳인 셈인데 이탈리아는 그게 잘 정착된 편이다(아마 유럽 대부분이 이렇지 싶다). 양보다는 맛과 멋을 즐기는 곳, 그러나 양으로 즐기더라도 주인입장에선 기분나쁜 일이 아닌 곳. 다만 때론 서서 술을 마시는 손님이 손해라면 손해인 곳. 우리 정서와는 멀지만 BAR 문화는 상당히 중독성이 있는 문화다.

우리의 와인잔을 채우고 있는 바텐더. 뒤로는 다양한 술들이 즐비하고 앞에는 그것들과 협연을 펼칠 보꼰치노들이 가지런하다. 가게 안은 우리를 포함 10명이 좀 넘는 손님들로 거의 발디딜 틈이 없는 상황.

큰일났다. 두서없이 마구 적어 내려가다보니 시간은 흘렀건만 아직 본론은 시작도 안했다. 줄리오의 집에서 즐긴 만찬과 이런저런 얘기들을 적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건 2부로 남겨야겠다. 사실 엘리자베따가 우리의 블로그를 거의 매일같이 모니터한다. 지난 번 그녀의 부모님 집에 다녀온 이야기도 2부에 걸쳐 연재했는데 생소한 경험이었던 만큼 어쨌든 남기긴 하지만 안올리면 엘리가 무척 섭섭하게 생각하겠다는 은근한 압박감도 있는게 사실이다. 이번 포스트 역시 그와 좀 비슷하다. 그래도 즐거운 작업이다. 2부는 이따가 밤에마저 작성해야겠다.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