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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27 파도바 가정식 2 An Invitation to Lunch in Padova 2 8


자, 이제 밥먹을 시간, 모두모두 자리에 앉고 접시에 올라올 요리를 잔뜩 기대하며 연장만 집어들면 된다. 예전엔 저 복잡한 연장앞에서 식욕보단 겁이 앞서곤 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엄격한 식사예절이 존재하겠지만 그건 값비싼 고급 식당에서 드레스와 턱시도 입고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고 싶을 때 얘기겠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즐기는 식사자리에선 오히려 그런 것에 연연하게 되면 손님은 물론이거니와 주인도 마음이 조마조마해져 식사 기분을 망치게 된다. 편하게 집히는대로 먹자. 참고만 하자면 접시 양쪽의 연장은 파스타나 고기를 썰어 먹을 때 쓰면 되고 윗쪽의 작은 연장은 간간이 빵에 치즈나 잼, 버터를 발라먹거나 식사 막판 디저트가 나올 때 쓰면 된다.

어이쿠 이런, 벌써 접시에 음식이 담겼네그려. 와인 따르는거 찍어야 한다니까 그새 누가 따라버렸구만. 음식이 다소 싱겁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사진 못찍은 못난 재주라 생각하고 어쨌든 맛들은 모두 훌륭했으니 하나씩 소개해보겠다. 이태리 가정식, 정확히는 북동부 베네토 주 파도바시에 사는 쟌까를라 여사의 70년 세월이 깃든 손맛이다.

첫 번째 선수 등장.


볼로네제 소스로 맛을 낸 라자냐 선수. 맛도 이름도 널리 알려진 음식이다. 넓직한 팬에 푸짐하게 익혀낸 것을 적당한 양으로 잘라 담아내 주셨다. 접시의 문양이 독특하다. 소스를 보고 생각난거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국내에서 판매하는 많은 종류의 파스타 소스는 대개 볼로네제가 아닐까 싶은데 토마토 소스에 당근과 샐러리, 그리고 고기 간걸 넣어 푹 끓여내면 완성된다. 북부를 상징하는 음식의 하나랄까?

몇 자 덧붙이면 남부는 농사와 수산업이 발달한 반면 중북부는 목축이 발달해서 고기가 풍부했단다. 그러다보니 북부는 프로슈토와 살라미는 물론 치즈를 비롯한 유가공품 발달로 이어져 자연히 음식도 기름진 것이 많은 반면 남부는 밭에서 일궈낸 싱싱한 채소와 생선을 위주로 한 건강식이 주류를 이룬다고. 오늘날 각광받는 이태리 음식이라면 그건 역시 남부다. 가볍고 건강한 식단이 풍요와 부를 상징하는 시대에 왜 아니겠나? 비록 가난으로 멸시받는 남부지만 음식으로 이뤄낸 문화적 자산은 북부사람들도 인정하는 것이 됐다.


대개 알듯이 볼로네제(BOLOGNESE) 소스란 '볼로냐 사람들의 소스'를 말한다. 파스타 전체를 넓게 덮은 고깃점들을 보는 것 만으로도 든든한 포만감이 전해지는데 볼로냐 사람들의 성향이 궁금해진다. (위키에선 볼로냐를 현자의 도시, 비만의 도시, 빨간 도시라고 해놨다. 현자는 볼로냐 대학, 비만은 기름진 식사, 빨간도시는 빨간색의 지붕에 빗대기도 하지만 좌파정치가 높은 인기를 구가한 때문이기도 하다고.)

우리에게 친숙한 맛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미트볼 스파게티가 그것. 사실 스파게티라고 하면 미트볼 스파게티만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아다시피 이건 미국으로 건너간 파스타가 그곳식으로 변형된 형태이고 국내에 파스타가 소개된 것도 미국문화에 딸려온 것에서 시작됐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야 뭐가 됐건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겠지만 원조논쟁의 당사자가 되면 생각이 달라진다. 김치의 원조논쟁이 일었을 때 우리들 스스로 얼마나 분통해 하고 초조해 했던가?

이탈리아 아줌마 아저씨들도 미트볼 스파게티에 열광하는 세계인의 식성까진 참겠는데 스파게티가 미국문화의 산물로 이해하는 지경에선 감정이 확 상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지금이야 지구촌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이 좁혀지면서 오해가 많이 불식됐지만 엉뚱하게도 가끔은 볼로제네 파스타를 향해 미트볼 스파게티라는 저주스런 산물을 낳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힐난과 시비가 사람들 사이에 종종 일어나는 모양이다. 별걸 다 갖고 다툰다 하겠지만 자신의 것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 이런 다툼은 보는 것도 즐겁고 음식맛도 더욱 좋게 해준다. 

오븐만 있다면 만들어 먹는게 어렵진 않겠지만 라자냐를 수퍼에서 파느냐가 문제. 스파게티와 펜네, 푸실리까지는 우리도 한국에서 봤는데 라자냐까지는 못본 것 같다. 없으면 더 좋다. 반죽해서 밀대로 넓게 밀어 잘라주면 그만. 레시피는 인터넷에 차고 넘치니 알아서..

굳이 묵직한 파스타의 핑계가 아니더라도 와인이 빠질 수 없다. 병에 붙은 저 라벨의 의미는 접어두고 포도주 맛만 얘기하자면 첫 맛이 놀라웠다. 일전에 안드레아 집에서 맛봤던 가정식 수제와인의 야생적인, 그러나 그에 비해 좀 더 안정된 맛이 살짝 감도는 듯 싶어 속으로 '앗? 모든 와인 애호가들이 공통으로 열광하는 맛의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일까?' 하며 맛을 음미했다. 허기진 입맛에 마신 것이어서 어쩌면 혀가 과장된 신호를 보낸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기도 했지만 애써 그 인상을 깎아낼 필요는 없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 다른 여러가지 음식이 겹치면서 와인 자체의 맛 또한 그 사이에 뭍혀버렸고 나중엔 평범한 정도의 맛으로 떨어진 듯 싶어 이 와인의 한계구나 싶었지만 강렬한 첫 인상은 뇌리에 또렷히 남았다. 

다 똑같을 것 같은 김치찌개에 어느 집은 빌딩을 올리고 어느 집은 망하는 이유는 그 미묘함을 대번에 알아채는 깐깐하고 단련된 사람들의 혀에서 비롯된다는 점, 사람들이 군말없이 먹는 것 같지만(일부는 그렇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혀는 어떤식으로든 그 댓가를 지불한 한다는 점을 식당 주인들은 꼭 알았으면 좋겠다. 혀의 응징은 그 식당에 다신 안가는거다. 

라자냐를 먹는 중에 엘리자베따의 첫째 조카 알레산드로(Alessandro)도 도착했다. 동생 루까에 비해 호리호리 하고 식성도 차분한 그는 엘리자베따의 말에 의하면 그의 아빠와는 달리 책도 많이 읽고 사색도 즐기는 타입이라고 한다. 동생 루까는 아직 어린탓도 있겠지만 식성이나 행동 여러면에서 형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중요한건 엘리자베따의 오빠, 즉 그녀 조카들의 아버지다. 오늘 식사자리에 엘리자베따의 오빠네는 참석하지 않았다. 엘리자베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렇다. 

 "우리 오빠는 장담컨데 학교 졸업하구서 책은 단 한 권도 읽지 않았을꺼야. 해외여행도 한 번 안하고 사람들과 더불어 즐기는걸 잘 모르는 사람이지. 오픈마인드가 아니니 세계관도 좁고,  동생으로서 여간 답답한게 아냐. 그 멍청한 베를루스코니를 지지하는 것 까지는 봐주겠는데 그런 삶의 태도가 사랑스런 조카들에게 고스란이 물들까 고모로써 걱정이 크다구. 그런점에서 알레산드로가 아빠를 닮지 않은 점은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지.."


요 얘긴 나중에 좀 더 덧붙이고 우선 먹던 길을 마저 가자. 쁘리모삐아또(PRIMO PIATTO-첫 번째 접시로 대개 파스타)를 먹었으니 세콘도를 먹을 차례. 육류나 조류, 생선이 두 번째 접시의 주연이기 마련인데 오늘의 주연은 독특하게도 동시 출연이다. 언뜻봐선 잘 알 수 없는데 뼈를 발라낸 닭고기가 갈은 쇠고기를 품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게 이 요리의 모습이다. 그걸 오븐에서 익혀 칼로 얌전히 썰어내면 되는데 음식점에서라면 모양이 망가가지 않게 조심조심 다뤘겠지만 집에서야 뭐..  바로 저런 모습이 된다.

근데 저게 그냥 닭과 쇠고기가 아니다. 쇠고기는 비뗄로, 즉 송아지 고기이고 닭은 Chiken이 아니라 기니아 포울(Guinea fowl)이라는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우리말로는 '뿔닭'이라고 나와있다. 물론 한국에는 없는 닭이다. 아프리카 기니아에서 나던 놈을 잡아다 유럽에서 닭처럼 키워 먹나본데 사진을 보니 좀 낯설긴 하지만 닭이 맞긴 맞다. 

                                                      (사진 : www.wikipedia.org)

육질도 맛도 닭과 거의 똑같다. 알고 먹었으면 혹시 차이가 있을까 싶어 신경을 곤두세웠겠지만.. 그래도 닭고기와 똑같다 생각했을 듯. 요리 자체는 송아지 고기를 갈아서 소금, 후추, 파마산 치즈, 계란 등으로 버무려 뼈를 발라낸 기니아 닭으로 감싸 실로 꽁꽁 묶은 뒤 오븐에서 구워 낸거고 촉촉함을 위해 오일과 버터, 백포도주를 적당히 섞어 고기에 뿌려주며 익혀냈다. 고기에서 나온 육즙과 어우러져 질척하니 맛이 진해졌다.

속속 등장하는 가니쉬(곁들임 음식)들.
 

감자 볶음. 로즈마리로 향을 내주고

엄지손가락 굵기의 호박을 송송 썰어 볶아낸 호박볶음도 나온다. 소박한 음식들.

할머니의 심부름을 부지런히 해내는 잔루까. 주거니 받거니 그릇을 돌려가며 한 접시 모두 담아내면 든든한 식사 탄생.

파스타로 일단 급한 허기는 껐고 입맛을 한껏 끌어올려 둔 상태니 이제 천천히 자근자근 썰어서 와인과 함께 먹어주면 된다. 일단 와인 한 모금으로 입안을 긴장시키고 .. 한 점 썰어서 .. 천천히 씹어주면 .. 비린내도 없고.. 맛난다. 

갈은 고기를 그냥 익혀먹는 바보는 없다. 그럴꺼면 굳이 힘들게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기에 각종 채소를 다져넣고 양념을 섞어 동그랑땡을 하거나 만두소로 만들거나 떡갈비를 만들기도 하는 한편 이탈리아에선 치즈를 넣는군. 그밖에도 다른 응용의 여지가 많을텐데 또 어떤 것이 방법이 있을지..

샐러드도 접시에 덜어내고 빵도 등장. 파스타도 그렇고 고기요리도 그렇지만 먹고나면 접시에 양념이나 소스가 흥건히 남는 경우가 많다. 주루룩 흐르는 국물이 보기 좀 그렇고 설겆이 하기에도 불편하고 그냥 버리기엔 어쩐지 아깝고.. 이럴 때 빵을 이용해서 남김없이 먹어주는 것이 이탈리아에선 미덕으로 통한다. 이를 스까르빠(Scarpa)라고 부르는데 '신발'이라는 뜻으로 뜯어낸 빵을 쥐고 접시의 소스를 깨끗히 닦아먹는 그 모습이 신발로 긁어내는 모습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좋은 문화다.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는 계율(?)은 여기서 이렇게 실천되고 있다.


배가 빵빵하게 불러온다. 토스카나의 시골에서 저녁을 먹으면 그 양이 만만찮아 때론 고통스럽다는데 다행히 북부 가정식에선 그런 괴로움은 없다. 이제 마지막, 디저트 선수다. 식탁에 올라온 것은 밤무스(MOUSSE DI CASTAGNE). 깎아낸 밤을 끓는 우유에 넣고 삶아 그 안에서 푹 익혀 으깨준다. 설탕과 크림을 섞어 거품을 내고 밤+밀크를 함께 섞어 충분히 저어준 뒤 냉장고에서 잠시 굳혔다가 위에 가게에서 파는 설탕에 절인 밤을 올리고 초콜릿 가루를 뿌려주면 끝.

모든 디저트는 다 맛있는 법, 이것도 예외는 아니다. 이탈리아 음식을 배우고자 한다면 결코 이 디저트를 빼먹으면 안될 것 같다. 단거 싫어하던 강양도 이제 이 문화에 상당히 깊숙히 빠져들고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 생활에서 달디 단 음식, 젤라또를 비롯해 쿠키, 캔디, 초콜렛, 티라미수, 케잌 등은 없어선 안될 필수 음식들이다. 칼로리에 대한 두려움으로 단 음식을 멀리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라지만 이탈리아는 아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사를 마치고 아쉬운 입맛을 아주 강력한 맛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야 말로 불필요한 군것질을 막는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 (이건 좀 아닌가?)


디저트에 곁들여 마시면 좋다는 스파클링 와인 한 잔씩. 점심 먹으면서 술이 돌고 디저트 먹으면서 또 돌고, 그것도 종목을 바꿔가면서. 잔도 멋있고 문화도 멋지다.

손자 루까에게 뭔가를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는 할머니 쟌까를라. 아까 엘리자베타의 오빠 얘기를 하면서 잠시 미룬다는 대목이 바로 요기다. 저기 한국에서 온 '언니 오빠'들한테 가서 뭐 궁금한거 물어보라고 할머니가 등을 떠미는 중인데 이유가 있다. 엘리자베따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손자들 만큼은 좀 더 다른 삶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굴뚝 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어떻게 하면 아빠의 모습만이 아닌 좀 더 다른 세상,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손자들에게 보여주고 세계관을 넓혀줄까 고민하던 차에 마침 우리를 식사에 초대하면서 아이들도 함께 부르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무슨 상관이랴^^) 할머니 할아버지의 애틋한 손자 사랑이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듯 하다.



식사 마치고 하나 컷. 모두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사진일 터. 특히 알레산드로와 루까가 오래 기억하길..ㅋㅋ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