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간단한 근황. 지난 주 가까운 아씨지를 다녀왔다. 날씨도 좋았고 동네도 근사했다. 성당 몇 개 둘러보면 되겠지 하고 얕잡아 봤는데 오후 1시부터 돌아다니기 시작해 이제 한 곳 봤다 싶었는데 어느새 4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기차시간을 알아보니 5시 기차를 타지 않으면 7시 기차를 타야하는 상황. 아씨지를 넉넉히 둘러보려면 하루는 꼬박 필요하겠더라. 붉은 빛을 받는 고성과 성당도 멋졌고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근사했고 기념품 판매에 혈안(?)이 된 수사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옆집, 그러니까 우리집과 같은 층에 있는 작은 방에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다는 이탈리아 '애송이'가 하나 입주했다. 이름은 네스뜨로. 키는 김군보다 조금 작고 얼굴은 서글서글하니 착하게 생겼는데 역시 주변으로부터 착하다는 칭송을 받는 우리와 발코니를 놓고 뜻하지 않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앞서 소개한 바 있듯이 멋진 풍광을 제공하는 이 발코니가 알고보니 우리집과 바로 네스뜨로의 집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었던 것. 근데 심각한 문제는 네스뜨로의 침실이 발코니에 나서는 순간 모두 엿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집주인(우리집 주인이기도 하다)이 우리가 발코니로 나서는 입구쪽에 창살을 설치했다는 점이다. 빨랫줄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다지만 발코니 끝에 서서 감상했던 풍광을 이제는 반쪽밖에는 볼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한 마디로 꼭지가 돌아버린 상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에 이어 우리에겐 두 번째로 경악스러운 사건이다. 의연하게 대처하는 생각에 친선우호적인 분위기속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여차저차 이야기가 오간끝에 창살을 좀 더 후퇴시킨다는 것으로 잠정 합의를 봤다. 그래도 발코니 끝에서 풍광을 즐길 수는 없는 상황.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후일을 도모키로 했다. 봄에 한국에 들어갔다가 다시 이 집으로 복귀하게 된다면 그때는 네스뜨로를 좋은 말로 구워 삶아서 저 창살을 없앨 생각이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적을 이길 수 없다면 적은 내편으로 만들어버리면 된다.
요며칠 날씨가 포근하다. 조만간 토스카나의 한 마을을 방문할 예정이다. 취재때문인데 만약 그곳에서 만난 어떤 인물이 충분히 얘기꺼리가 되고 그가 협조적이라면 그 마을에서 적어도 1주일 가량 머물며 카메라를 돌릴 생각이다. 그리고 볼로냐의 한 유서깊은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정열넘치는 한국청년이 있다고 하는데 그 친구도 한 번 만나러 볼로냐를 방문할 계획이다. 김군은 이탈리아 모든 곳이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특히 볼로냐가 마음에 와닿는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적당히 붐비고 적당히 지저분하고 적당히 큰 도시. 특히 찌를듯이 솟은 타워를 보는 순간 허를 찔리는 느낌이 들 수 밖에 없는데 시에나의 타워도 멋지지만 볼로냐만큼은 아니다. 볼로냐만의 고집스런 긍지 하나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며칠 전 뻬루자에 공부하러 온 외대 학생들을 집을 초대해 함께 저녁을 먹었다. '먹었다' 보다는 '먹였다'가 더 적합한 표현일 듯 싶은데 이탈리아 온 지 1주일 밖에 안된 탓에 그간 적응도 못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는 말을 듣고 어찌나 가엽고 애처롭던지.. 마침 강양의 생일날이기도 해서 파스타와 리조또로 허기와 외로움을 단박에 날려주었다. 강양 몫이 좀 줄어들긴 했지만 먹는 즐거움을 여럿이 만끽했다는 것으로 마음만은 푸짐해졌다. 오늘 지난 번에 미처 시도하지 못했던 돼지고기 토마토 조림 스테이크를 시도했는데 조금만 더 보완하면 메뉴로 올려도 손색이 없겠다는 평가를 강양과 며칠 째 우리집에서 머물고 있는 몰타 플랫메이트 지희로부터 받아냈다. 노파심에 말해두지만 지금 하는 요리들은 사실 호기심의 수준일 뿐 당장 식당을 염두해두고 하는 요리는 아니다. 진짜는 좀 더 후다. ㅋㅋ 그나저나 이제 불혹이라니..
며칠 전 시에나를 다녀왔다. 치솟은 첨탑과 그것을 향해 경사지게 설계된 광장으로 유명한 돈 많은 토스카나주의 유명한 그동네.
한겨울이지만 광장으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마주하노라면 그늘진 골목길을 걷는동안 얼어버린 몸이 사르르 녹는바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햇살을 '먹기위해' 저 광장으로 몰려든다. 햇살은 맛만 좀 본 뒤 우리는 엘리자베따의 추천으로 찾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바로 아래 식당, 오스떼리아 '일 그라따치엘로'. 해석하면 '고층건물'.
고층건물.. 허나 식당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먼게 아니라 심각하게 멀다.
벽 봐라. 다 무너져간다. 회칠도 벗겨져서 아슬아슬한 벽돌이 벌겋다 못해 시커멓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만약 이 식당이 실제로 고층건물의 아래에 있었다면 이미 망했을 것이다. 무너져서. 허나 식당은 점심무렵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사람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식당이 너무 좁다. 실내는 긴 테이블 3개를 놓아 앉을 자리만 나면 눈치껏 앉아서 먹으면 되는 아주 실용적이고 서민적인 분위기의 식당이다. 결국 안에서 테이블을 확보못한 우리는 보다시피 밖에서 상을 차려야 했다. 사소한 불편은 그러나 가격과 맛에서 충분히 보상이 된다.
샐러드와 치즈, 프로슈또, 살라미가 주종을 이루는 진열장의 음식들. 그 너머로 두 청년이 열심히 샐러드를 접시에 담고 프로슈또를 썰고 있다. 조리시설이 없으니 파스타는 판매하지 않고 보이는 음식들 중 먹고싶은 것은 손으로 콕콕 찍으면 알아서 담아 가격을 매겨준다. 가격은 그렇게 담아서 한 접시에 적게는 5유로에서 많이 담을 때는 10유로까지 낸다.
이미 자리를 차지한 손님들은 식사에 열중,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한 이들은 기다림에 열중. 실내가 좁다는게 느껴지는지.. 저 자리에서 사진찍고 있다가 손님이 들어오면 문이 뒷통수를 쿵 하고 칠 지경이다.
3종 구성. 찐보리가 치즈와 몇 가지 채소, 올리브유를 만나 샐러드로 변신했다. 다진 이탈리안 파슬리에 알리치를 버무렸고 정어리 필레(살만 발라낸 것)는 샐러드용 붉은 양파와 함께 올리브유로 무쳐냈다. 날생선을 어떻게 먹냐고 몸서리치는 적잖은 서양인들은 대체 저건 어떻게 생각할지, 먹기는 할지 궁금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고.. 아무튼 접시 옆 빵바구니에는 빵이 수북한데 사진의 놈들을 빵에 얹어 먹으면 미끄덩 하지만 짭짤하니 맛있다. 맵고 짠 한국음식도 맛있지만 심심한듯 보이는 이런 음식도 혀의 미세한 감각을 깨우며 맛을 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특히 한국 밥상에서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는 접할 기회가 흔치 않고 식용유보다 몸에 좋다는 인식 때문에 대개 부침할 때 쓰곤 하는데 역시 올리브유는 저렇게 신선한 드레싱이나 샐러드용으로 즐겨야 제맛을 만날 수 있다. 처음엔 잘 몰랐지만 자주 먹다보니 향긋함도 '읽혀'지고 어느새 그 맛을 즐기는 것은 물론 좋은 올리브유를 간파해내는 입맛도 생겨가고 있다. 찐보리 샐러드는 특별한 맛을 모르겠다는.. 맛보다는 입안에서 먹는 식감에 재미를 찾는 건강 샐러드가 아닐까 싶다. 저렇게도 요리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
핏기 벌건 이탈리아의 국민햄 프로슈또와 살라미. 살라미에 후추 박힌거 봐라. 먹음직스럽지 않나? 돼지 비린향을 허브가 살짝 잡아주긴 하지만 비위 유독 약한 사람이라면 살라미나 프로슈또는 도전이 쉽지 않을 수 있다. 강양은 정말 '좋은' 프로슈또는 용감히 먹지만 좀 질이 낮은 것, 주로 수퍼마켓 프로슈또는 잘 안먹는다. 가끔 다소 비리다 싶은 프로슈또를 만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가공의 문제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론 돼지의 품종과 품질이 맛을 좌우한다고 봐야 할테다. 김군은 좋다고 다 잘먹는다. 빵에 얹어 먹는 것도 좋고 긴 스틱 형태의 비스켓에 돌돌 말아 먹는 것도 재밌고 맛있다. 여기에 올리브절임 하나 곁들이면 아유.. 토스카나의 프로슈또는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짜다는게 엘리자베따의 설명. 한때 맛있다고 낼름낼름 집어먹다가 그 짠기운에 밤새 물을 찾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는 것. 해서 프로슈또와 곁들여먹는 빵에는 소금을 넣지 않는게 또한 이곳의 특징이기도 하다고. 실제 빵 자체만 씹으면 아무런 간이 없어 맹숭맹숭한 것이 별 맛이 없다. 빵에 소금을 넣지 않는 또 다른 설도 있는데 옛날에는 소금이 귀해 세금이 제법 무거웠단다. 빵가게에선 그 부담을 피해 소금량을 줄이거나 아예 넣지 않고 빵을 굽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날 무염빵의 한 유래로 전해지기도 한다고.
토스카나에 왔으니 비록 싸구려지만 끼안띠도 한 잔 곁들이고.. 잔이 아니라 컵에 따라 마시는 끼안띠.. 식사 내용 자체는 대개 서양 식사의 첫 번째 코스인 안티파스토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식사가 될 양과 맛이다. 세 명이 점심 한 끼 먹는 양으로는 그 절대량이 부족해보이는 듯 싶지만 사진에 안나온 빵과 곁들이고 와인까지 홀짝이다 보면 어느새 포만감이 느껴진다. 특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곁들이며 오랜시간 식사를 즐기는 것이 빨리 먹는 식사보다 훨씬 큰 포만감을 준다지 않던가. 파스타 폭식은 분명 복부비만을 야기시키겠지만 저런 식의 가벼운 안티파스토식 식사는 포만감은 주는 대신 배를 빵빵하게 만드는 부작용은 없지 싶다. 한국에서 여성 2인이 미래의 달고나 식당에 온다면 안티파스토 한 접시와 파스타 한 접시면 충분할 듯. 질질 흐르는 올리브유에 겁먹지 말지어다. 맛들이면 식생활이 더 즐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