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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02 스페인 오징어 깡통 7

딱 1년 전 이맘때 뭘 먹었을까? 순간 궁금해져 사진첩을 뒤적였다. 1년 전이면 몰타에서 한창 영어공부를 할 때로 햇살은 뜨겁지만 집안에 있으면 서늘함이 느껴지는 지중해풍 날씨를 만끽하고 있을 때다. 먹는 것에도 어느정도 나름의 요령을 터득해 주변에서 취할 수 있는 재료들을 입맛에 맞도록 솜씨를 터득해가던 즈음이었고 바닷물은 아직 차가워서 비키니 차림의 마음 급한 피서객들이 발만 적시고 선뜩 바닷속으로 뛰어들기를 주저하던 때이기도 했다.


몰타에서 함께 공부하던 한 한국 친구가 짧은 스페인 여행을 다녀오면서 선물이라고 오징어 깡통을 사왔다. 손바닥 반 만한 크기의 깡통에는 붉은 빛깔의 양념으로 볶은 오징어가 올리브오일과 더불어 요령좋게 담겨 있었다. 일찌기 들은 바로는 스페인의 깡통식품 산업이 엄청나다는, 즉 깡통으로 못담아내는 음식이 없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그 표본 하나가 눈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싶다. 아무튼 다른 한국 친구들의 시선을 피해 '은밀히' 전해받은 이 깡통을 애지중지 보관하다 6월 1일, 바로 1년전 어제 해치우기로 했다. 콩 한쪽도 나눠먹는 인심을 평소 실천해 왔다고 자부하지만(아마도..) 이번엔 친구의 '은밀한 마음'을 고려해 베풂없이 모두 먹어치우기로 했다.



산업의 차가운 손길로 빚어낸 음식을 그대로 먹는 다는 것은 우리로선 용납할 수 없는 일. 이에 더해 그 양을 극대화시켜 포식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2차 조리는 필수다. 물론 이는 기본 소스, 또는 양념이 맛의 후방을 얼마나 든든한 물량으로 뒷받침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법인데 사진에서 보듯 시뻘건 화력이 믿음을 두텁게 해준다. 여기에 비장의 무기, 고추장이 가세해준다면 맛의 전선이 흔들릴 일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고추장으로 살짝 초벌한 양파에 스페인 깡통 오징어를 투하. 지글거리는 소리와 매콤한 향이 주방을 가득 채우니 온몸에 기운이 솟는다. 깡통속 양념은 그 빛깔과 달리 매운 맛이 거의 없는 토마토 베이스 양념이다. 전혀 맵지가 않으니 그 밍밍함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고추장을 이용한 2차 조리는 필수.


스페인 오징어 볶음의 맞수로 등장한 김밥. 오로지 밥만 채운 충무 스타일이다. 김을 장시간 냉동(혹은 냉장)보관하게 되면 습기를 머금음과 동시에 오랜 시간에 따른 맛의 변질로 특유의 비린 향을 내기 쉬운데 가스불에 살짝 구워주면 이를 단박에 잡을 수 있다. 뜨거운 밥이 뿜어내는 열기에 김향이 더해져 정신을 혼미케 한다.



여기에 맛을 더욱 돋궈줄 무적의 파트너 양파절임. 몰타에선 대략 3가지 종류의 양파를 맛볼 수 있는데 병에 담긴 저것은 양파라기 보다는 굉장히 큰 락교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낳게 했다. 주변의 일부 한국친구들에게 그야말로 '퍼'줬던 아이템. 한 입 아삭 베어물면 턱뼈가 시큰 저려온다.



완성. 스페인산 오징어 요리를 한국산 고추장에 볶아 이탈리아산 쌀을 지어 김에 말아 영국산 접시에 담아낸 다국적(혹은 정체 불명) 요리. 맛의 오합지졸을 보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꺼져가는 식성을 되살리는데 기대 이상의 높은 기량을 발휘한다. 맛은 단지 맛 만으로 기억되지 않는다던가? 그 때의 공기의 질감도 부쩍 떠오르는 요즘이다.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