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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2 베로나, 석 달 만에 다시 그 자리로. 8
  2. 2008.12.29 이제 사람사는 집 같네.. 6

베로나에 조금 전인 3시 20분에 도착했다. 뻬루자, 피렌체, 볼로냐, 베로나로 이어지는 여정은 총 5시간 30분이 소요됐고 2명 기차요금만 12만원 가까이가 깨졌다. 좀 짜증나는건 오는 내내 표검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 이런 예가 종종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한 코스에선 할 줄 알았는데 퍼펙트하게 검표를 안하니 애써 뭍어두고 있는 무임승차에 대한 욕망이 또다시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것 같아 그게 짜증이다. 사람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완벽한 인간이 되질 못했으니 제발 그런 싹이 트지 않게끔 미리 잘라달란 말이다. 

어제 뻬루자의 날씨가 오락가락하며 눈발을 살짝 뿌리더니 새벽부터는 제법 무서운 기세로 함박눈을 쏟아냈다. 찬바람까지 쌩쌩 불어대니 오랫만에 침대에 누어 창문을 통해 눈보라를 감상했다. 어찌나 잠이 안오던지.. 다음날 일찌감치 뭔가 중요한 일(가령 멀리 떠나거나..)을 해야하는 경우엔 대개 그렇기도 하지만 뻬루자에서의, 특히 그 집에서의 마지막 밤잠이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싱숭생숭해진 탓도 있다. 누워서 고개만 까딱 세워 바라보던 저 아래 도심의 불빛도, 휘영청 보름달이 제길 따라 움직이는 모습도, 멀리 아스라한 아씨지와 그 아래 봄기운이 피어오르던 찰나의 들녘도, 그리고 집의 윗층을 떠받치고 있는 육중한 나무들보의 천정도 이제 특별한 인연이 없는 한 마주할 일이 없다. 그게 아쉬워 하나하나에 마지막 시선을 던져줬고 그러다가 동태를 이용해 파스타를 만들면 어떨까에 대해 한참 고민을 하다가 겨우 잠이 든 듯.. 


새벽의 눈은 아침까지도 이어졌고 바람은 칼처럼 차가웠는데 8시 14분, 언제나처럼 아레쪼로 출발하기로 돼 있는 열차는 연착이 아니라 아예 없어져 버렸고 1시간 30분 후에 피렌체로 출발하는 열차가 유일해서 그걸 대신 잡아타고 와야 했다. 아무튼 어느 구간에서도 표검사를 하지 않더라는..

그제와 어제에 걸쳐 한국으로 보내야 할 자잘한 짐과 책들 대부분을 소포로 부쳤다. 총 40kg의 무게에 책만 30kg. 배로 보냈으니 아마 우리가 귀국할 즈음으로 해서 받을 수 있지 싶은데 시간은 얼마가 걸려도 좋으니 제발 무사히 배달돼 다오. 책 부치고 나니 어찌나 홀가분하던지.. 위태롭게 겨울을 나게했던 이불은 그 집에 고스란히 남겨놓고 왔고 파르마 노양이 주고 간 전기장판도 그곳에서 다른 누군가를 데피도록 남겨놓고 왔다. 그 전기장판 없었다면 우린 모두 얼어죽었을 것. 플라스틱 밥그릇, 스텐 양재기, 사기 대접, 도마, 후라이팬 등을 꾸역꾸역 짊어지고 왔고 아직도 한참은 먹을 감자와 양파, 올리브유, 간장, 고춧가루, 멸치등도 배낭 구석구석에 쑤셔넣어 지고 왔다. 빵빵하게 부푼 가방들의 지퍼를 열면 양말, 빤스와 더불어 이것들이 마구마구 튕겨나올 태세니 절대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진 이것을 열어선 안된다는 다짐을 되새기며. 애네들도 다음달 1일 베로나를 떠날 때면 모두 우리손을 떠난다. 그 때면 짐이 대폭 줄어든다. 물론 그 공백은 감사의 선물들로 다시 채워지겠지만. (자~ 김치국 뜬 수저 언능 내려 놓으시고..)

낭패가 하나 생겼다. 다음달 중순 경으로 알고 있던 비니 이탈리 행사가 2일부터 6일까지라고 한다. 그때문에 데이빗 숙소가 딱 그 기간에 풀북(FULL BOOK-예약만땅)이 되서 방이 없다는 것. 그러나 우리에겐 당장 방이 없는 문제보다도 예상보다 훨씬 일찍 행사가 시작된 점이 더 큰 낭패다. 그렇게 되면 지금 편집중인 작업 일정을 어떻게 조정해야할지 다시 계획을 세워야 할 판. 그러면 귀국일정도 영향을 받지 싶은데 좀 더 일찍 들어갈 수도 있을 듯.  이거이거 일에 쫓겨서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면 안되는데..

어제 간만에 옛 회사 동료와 메신저를 주고받다가 그 친구가 물었다.  "영영 들어오는거에요?"
잠깐 당황하다가 "아마 한국, 이탈리아를 자주 오가도록 노력하겠지"라고 엉거주춤 답했다.   '영영'이라..
6개월, 어찌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인생이 새롭게 '포맷'된 후 처음으로 기록된 새로운 삶의 파일들이 이탈리아여서 그 바탕은 좀 더 오래 가지 않을까? 생각날테고 그리울테고 어쩌면 좀 더 현실적인 이유로 필요할테고. 그리고 아직 젊은데 '영영'이란 말은 좀 안어울리지 않나?  

 

Posted by dalgonaa

정확히 아침 8시 10분이면 발코니로 나가는 유리문을 통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온 햇빛이 침대 머리맡 흰 벽을 붉게 물들인다. 자다가 깨서 고개만 까딱 세우면 그 햇빛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데 어제 아침엔 9시가 다 되가는데도 햇빛이 비추지 않았다. '날씨가 흐린게로군'하며 슬리퍼를 주섬주섬 신고 문쪽으로 다가가니 그제서야 눈이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불현듯 든 생각이 '비는 소리가 나지만 눈은 소리가 안난다'는 것.

그리고 보니 유럽에 와서 처음으로 맞는 눈이다. 함박눈 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의 눈이 펑펑 쏟아졌고 지붕위에도, 빨래줄 위에도 내려앉았다. 눈을 바라보는 눈이 시원해졌고 내친김에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오늘은 첫눈 소식 못지않게 특별한 날이다. 베로나의 우리 짐을 싣고 엘리자베따가 뻬루자에 오는 날이기 때문. 앞서 얘기했다시피 이로써 20만원에 이르는 교통비를 아끼게 됐고 또한 생활에 필요한 온갖 물건들을 편하게 앉아서 받게 됐으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엘리가 오후 늦게쯤에나 도착할까 싶어 아침일찍 기차로 1시간이 채 안걸리는남쪽의 시골마을 트레비(Trevi)에서 매달 마지막 일요일에 열린다는 골동품 시장을 구경하려 했는데 12시쯤에 도착한다고 해 이 일정은 취소했다. 눈도 오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다.

맘만 먹으면 차를 집앞 골목까지 끌고들어올 수 있겠지만 들어오는 길과 달리 나가는 길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나가는지를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우리가 종종 이용하는 광장 근처의 수퍼마켓 앞에서 보기로 했다. 뻬루자는 좁은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곳이어서 지도가 없으면 길 잃기 딱 좋고 있어도 길 찾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매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된다. 왜냐면 골목길이 하나같이 멋지기 때문.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게 이곳의 골목길이다. 특히 안개라도 끼면 그야말로 죽음이다.

이런.. 엘리가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 비상등을 켠 차에 다가가니 엘리가 그제서야 알아보고 차문을 열고 반갑게 우릴 맞는다. '차오~ 쪽쪽!' 이탈리아는 두 번에 걸쳐 양쪽에 볼키스를 하는 것이 인사법. 무거운 짐을 차에 싣는게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 싣고 왔다. 뻬루자는 20년 만에 처음 방문이라는 엘리, 그녀는 이곳 호텔을 예약했고 크리스마스 첫 주서부터 연말 휴가중인 그녀는 뻬루자에 이틀 정도 머물 예정이다. 당연히 이날 저녁은 우리집에서 먹어야 한다. 해서 김군은 이미 전날 육계장을 한 솥 끓여놨다. 고기와 무를 제외하고 주요 건더기들이 많이 빠졌지만 그래도 맛은 제법 난다.  


차에서 내리며 외투를 서둘러 걸치는 엘리자베따. 차문을 열어놨길래 쿵 하고 닫아줬더니 키 꽂은 채로 문을 닫아두면 얼마후 자동으로 문이 잠겨버리는 낭패가 생긴다나.. 한쪽 문은 열어뒀다.

저녁 7시에 광장에서 만나 먼저 아페리띠보 한 잔 하기로 하고 헤어진 뒤 짐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헌데 이미 며칠 째 살고 있는 집이지만 온갖 살림을 담은 짐을 끌고 들어서니 왠지 이제서야 진짜 살 집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꽁꽁 닫아둔 짐을 풀어내니 좁은 주방겸 거실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휴지도 나오고 잘 싸둔 칼도 나오고 겹겹이 포장한 간장과 식초도 나온다. 여벌의 옷들과 책, 특히 귀 후비는 면봉을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샤워하고 난 뒤 물기로 간질거니는 귀를 닦고 싶어 어찌나 쩔쩔 맸는지..ㅋㅋ 텅텅 빈 집안의 수납장에 살림을 쟁여넣고 빈책장을 책으로 채웠다. 다시 걸레를 들고 미처 닦지 못한 곳을 구석구석 신나게 닦아내니 비록 당분간이지만 '이제 우리집이다'하는 실감이 든다.


보기엔 저래도 상당히 많은 짐. 무게도 꽤 나가서 짧은 거리를 지고 끌고 오는데도 땀이 다 났다.

집 구경 잠시 해볼까?

거실겸 주방. 몰타의 주방만 저거 딱 두 배였다. 그래도 전자렌지를 제외하고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으니 딱히 아쉬운건 없다. 앞집과 창문을 마주하고 있어 얇은 머플러를 응급으로 둘러쳐놨다. 가끔 대머리 총각이 창문을 열고 빨래는 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제법 넓직한 화장실겸 욕실. 창문을 갖추고 있어 불쾌한 냄새나 습기를 쉽게 뺄 수 있다는 점이 장점.

화장실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제법 고풍스럽다. 달리 생각하면 저 수많은 창문에서 우리집 화장실을 훔쳐볼 수도 있다는 얘기. 허나 밤이 되서 불켜지는 창문은 고작해야 2개 정도. 많은 집들이 비어있다. 3층으로 구성되어 총 4가구가 살 수 있는 우리집 건물도 지금은 달랑 우리만 살고 있다. 뻬루자가 정상을 향해 계단식으로 지어진 도시인 탓에 우리집의 2층 높이가 저 앞집에선 1층이 된다.

김군의 '집무실'로 불리는 건넛방. 옷장, 책장, 책상을 두루 갖췄음은 물론 하얀 레이스가 달린 창문도 있는 아담한 방이다. 여기에 한국인 민박을 쳐볼까 진지하게 고민중 ㅋㅋ. 한국에서 가족이나 지인들이 오면 제공할 방이기도 하다. 그럴듯해 보이는 침대지만 스프링 탄력이 고무줄 같아서 허리 안좋은 사람은 작살날 수 있는 무서운 침대. 책상 위에 뜯지않은 빠네또네가 놓여있다. 크리스마스 끝나자마자 1.5유로라는 놀라운 가격으로 대폭 떨어졌길래 냉큼 하나 사왔다. 살 빵빵 찌고있다. 


이른바 안방. 커다란 옷장도 두 개나 있고 책상과 책장도 저처럼 구성지게(?) 갖춰져 있다. 싱글침대 두 개를 붙여 쓰는데 사진에 안나온 왼쪽 구석탱이에 난방기가 있어 강양은 그쪽에 꼭 붙어 잔다. 집이 전반적으로 추운편이지만 마침 베로나에 있던 전기장판도 왔으니 이제 김군도 좀 따끈하게 잘 수 있게 됐다. 밝은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발코니. 자면서 별도 볼 수 있고 저 멀리 아씨지의 아른거리는 불빛도 볼 수 있다는 점이 이 방의 강점.

미처 사진으로 담지 못했지만 엘리자베따를 위해 육계장에 더해 비빔밥을 만들었다. 시금치와 호박, 당근, 버섯을 볶고 색색의 계란지단도 부쳐냈고 무생채도 곁들였다. 색색의 그 모양이 꽤나 신기하게 보였을텐데 아니나 다를까 감탄 연발이다. 매운 맛을 두려워하는 그녀지만 참기른 살짝 둘러 비벼줬더니 맛있다며 잘 먹는다. 특히 육계장은 칼칼한 맛에도 불구하고 고기국물의 깊은 맛이 이탈리아에서 또르뗄리니를 넣고 즐기는 브로도(Brodo)와 흡사하다며 싹싹 비운다. 브로도는 이탈리아의 육수다.

중국상점에서 마침 두부를 팔길래 3모(한 모에 1,300원 정도)를 사둔게 있어 이걸 팬에 튀기고 다시 양념장을 만들어 자작하게 붓고 조렸다. 엘리는 평소 '두부는 '무미(無味)'한 맛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맛있다'며 덥썩덥썩 잘 집어먹는다. 간장양념의 맛에 엘리도 이제 조금씩 중독이 돼가고 있으리라. 팩소주가 하나 있어 이왕 벌어진 한국밥상, 팩소주를 하나 깠다. 차갑게 식혀놨더니 한 잔 맛을 본 엘리는 별로 쎄지 않단다. 차가우니 당연하지. 먼길을 마다않고 와준 엘리에게 보답한 오늘의 식탁, 사실 그간의 도움을 떠올리면 이것도 부족하지 싶다. 우래옥표 불고기를 한 번 먹여봐야 할텐데..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