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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24 파도바 가정식 1 An Invitation to Lunch in Padova 1 2


이탈리아에서 해가 가장 늦게 지는 동계올림픽의 도시 TORINO를 출발해 북부의 심장부 MILANO를 지나 동쪽 끝의 '문명' VENEZIA를 향해 깨끗히 뻗은 A4 고속도로. 그 양옆으로 남과 북이 갈리는데 오른쪽은 드넓은 롬바르디아 평야가 펼쳐지고 왼쪽으론 알프스 준령으로 치달으려는 크고 작은 산들이 저 멀리 듬성듬성 솟아 있다. 그중 꽤 높아보이는 산의 정상엔 어느새 하얀 눈이 내려 앉았다. 겨울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주말을 맞아 오랫만에 고속도로를 달린다. 엘리자베따와 함께 그녀의 차를 타고 그녀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PADOVA로 가는 길, 그녀의 부모님이 우리를 점심식사에 초대해 밥먹으러 가는 것이다. 이런 기회는 주저없이 챙겨야 한다.


은근히 스피드 광인 엘리자베따. 그녀의 차를 몇번 타보면서 이탈리아는 비교적 추월의 개념이 잘 자리잡혀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는데 1차선을 달리다 뒤에서 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면 어김없이 2차선으로 길을 비켜준다. 엘리가 추월을 시도할 때도 앞차가 자연스럽게 2차선으로 비켜난다.

파도바는 A4 고속도로 동쪽의 거의 끝자락에 걸쳐있는 도시로 베로나보다 좀 더 규모가 크고 베네찌아로부터는 20여분 정도 떨어져 있다. '교육'과 '종교'가 이 도시의 관통하는 단어라는데 파도바 대학은 그 역사가 800년에 이르고 있어 오래됨에선 볼로냐 대학에 이어 두 번째. 오늘날에도 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이탈리아 젊은이들의 면학 열기가 장난 아니라는데 잠시 인터넷을 뒤져보니 갈릴레오가 한 때 이곳에서 강의를 했고 코페르니쿠스도 이 대학에서 공부를 했단다. 극락에서건 천당에서건 이 대학 출신들 동문회 한 번 열리면 볼만하겠다.


사진은 13세기에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 성 안토니오 성당(St, Antonio). 그는 죽어 카톨릭 성인으로 봉안됐고 성당에는 1231년 타계한 그의 혀를 잘라 성유물로 보관하고 있으며 실제 관람할 수도 있다. 그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꾸욱.


다시 길로 돌아와 가던 길을 가자. 가을 추수가 끝난 들판은 서둘러 뿌린 채소 씨앗이 그새 싹을 터 얇게 덮힌 곳도 있고 그냥 까만 흙을 드러내고 있는 곳도 있다. 곧 겨울이 다가옴에도 그 틈에 키워 소출을 올릴 작물이 있나본데 놀고 있는 땅이더라도 어느 곳 하나 방치된 느낌은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정리와 관리가 깔끔하다. 평화로운 목가적 풍경, 어디 하나 콕 점찍어 그곳에 살림 깔고 앉아 낮엔 밭이나 갈고 밤엔 마당에 천체망원경 하나 세워 별이나 관찰하며 고기나 구어먹고 살고픈 충동이 일렁인다.

비록 이탈리아더라도 이왕이면 고기는 양념갈비를 구어야 제맛. 맛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뭉친 이탈리아라지만 적어도 고기요리만 놓고 보자면 우리가 한 수 위 아닐까 싶다. 이네들의 심플한 조리법은 고기요리에도 이어져 우리처럼 요란하게 다지고 갈아넣고 재우고 하는 과정이 거의 없지 않나 싶은데 가령 돼지고기의 경우 손바닥 만한 고깃덩이를 로즈마리나 기타 허브를 곁들여 팬에서 올리브 기름에 '튀겨'먹는 것이 가장 흔한 방식이다. 갈비기름과 양념이 뚝뚝 떨어져 피어오르는 흰 연기의 향 앞에서 솟구치는 육식의 본능을 어찌 억제할 수 있을까! 그 맛을 한 번 보여주고 싶은데 이곳 이탈리아에서 과연 기회가 있을런지..

고속도로 휴게소는 이탈리아에서 AUTOGRILL이라 부른다. 질주하는 차량들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 마시거나 간식을 즐기는 것도 재밌겠다. 돋보이는 아이디어.

거의 1시간을 달려 파도바에 들어섰고 우회전, 좌회전 몇 번 하니 바로 부모님의 집에 도착한다. 낮은 담벼락, 리모컨을 누르자 담 높이의 문이 열리면서 차가 들어갈 길이 나타난다. 마당있는 집은 이래서 좋다. 이탈리아도 남북간의 경제력 차이로 인한 갈등이 엄존하지만 적어도 권역별로 발달된 중심도시를 갖고 있어 이를 중심으로 인구가 골고루 분산된 상황. 수도권에만 2천500만, 각박하기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우리로선 이런 널널한 환경이 마냥 부러울 수 밖에 없다. 우리 자신도 그 수도권에 살지만 참 납득이 안가는 모습이다.


제법 넓은 평수의 2층 건물. 두 가구로 이뤄진 집은 엘리자베타 부모님이 한 집, 오빠네가 한 집, 이렇게 단촐하게(?) 산다고 한다. 30년 전부터 살았다고 하니 내부 리모델링이야 했겠지만 건물 자체는 30년이 넘은 셈이다.

짙은 갈색 호마이카 문을 두들기자 휠체어에 앉은 엘리 아빠가 문을 열고 반갑게 우릴 맞는다. 77세의 노신사 루치아노(Luciano). 유난히 하얀 얼굴을 가진 그를 짙은 남색 스웨터가 더욱 하얗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오랜 휠체어 생활, 바깥 볕을 쐬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테다. 좀 엉뚱한 생각이지만, 영화 탓일꺼라 추측하는데 유난히 하얀 얼굴의 백인을 보면 왜 나치의 냉혈한 모습이 떠오르는지 원.. 돌아오는 길, 엘리로부터 들은 아버지에 관한 짧막한 이야기는 결코 그런 인상과는 거리가 멈에도 처음에 받은 인상은 쉽게 지워지질 않는다.

집은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더 넓게 느껴진다. 1층은 아버지가 일한다는 사무실이 있고(사무실이라기 보다는 집무실 분위기) 집은 2층이다. 사무실 반대편엔 10명 정도가 밤새도록 신나게 파티를 벌일 수 있는 방이 있는데 아주 작은 규모의 호프집 같은 분위기다. 버리지 않은 빈 맥주캔, 가득 채워진 다양한 독주, 벽에는 빛바랜 사진과 장식용 접시, 방석 따위도 걸려있어 분위기를 돋궈주니 분위기 좋은 술집이 하나 안부럽다. 구석에는 각지의 포도주가 쌓여있으니 맘만 먹으면 며칠이고 달리다 병원에 실려갈 수 있겠다. 일터와 술집을 동시에 갖춘 집, 근사하다.


먼저 두꺼운 겉옷을 벗어 벽 한쪽의 조각품 같은 옷걸이에 걸었다. 집안에 들어온 손님의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거는 모습은 영화에서 종종 봤던 액션. 걸기보단 걸치거나 던져놓는 것에 익숙했으니 낯설음에 긴장감이 가볍게 찰랑인다. 2층으로 올라가는 짧은 계단, 주방에서 새나온 음식 냄새를 접하니 식욕이 상한가를 친다. 아침에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끓여 먹고 온 것이 전부이니 당연하고 바라던 바이기도 하다.  (미처 사진에 담진 못했지만 집안엔 아빠를 위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어 오르내리는데 전혀 불편이 없다. 토리노 호텔의 그것보다 훨씬 좋고 넓었다)

엘리가 '맘마'하고 기척을 알리자 그의 엄마 쟌 까를라(GianCarla)가 주방에서 나와 그녀를 껴안는다. 반가운 표정과 웃음소리가 뒤섞이는 가운데 우리도 곧 서툰 이탈리아 말로 인사를 건넨다. "본죠르노 삐아체레"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쟌 까를라는 남편보다 3살 적은 74세, 이제 고령에 접어들 나이지만 7인분의 식사를 척척 만들어낼 만큼 기력이 넘치는 할머니다. 이들 모두 1930년대에 태어나 무솔리니 시절을 거치고 2차 대전을 겪어낸 산 증인들이니 어쩐지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를 접하는 느낌이 든다.

엄마는 마저 음식을 준비한다며 주방으로 들어갔고 그 모습을 놓칠 수 없으니 따라 들어가보는데 거쳐가는 식당에는 테이블이 이미 깔끔하게 세팅돼 있다. 오늘 호사좀 누리겠다는 기대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7인분의 접시가 놓여있다. 엘리의 조카들이 함께 식사를 할 예정인데 아직 학교에서 안왔다.


쟌 까를라 여사가 감자를 썰고있다. 그러나 주방은 길쭉한 형태로 4명이 서면 꽉 들어차 운동장처럼 넓직넓직한 거실과 방에 비하면 꽤나 좁다. 우리가 묵고 있는 작은 숙소의 그 주방보다 쪼금 큰 정도인데  좁은 싱크대, 가스버너와 일체로 쓰는 오븐, 벽을 따라 선반이 채워져 있는 모습들은 한국 엄마들이 쓰는 주방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소박한 모습. 하지만 큰 손님 치뤄낸다면 꽤나 고생스러울 공간이다. 넓고 화려한 시스템 키친이 넘쳐나는 시대, 넓은 집의 안주인으로서 욕심을 낼만도 할텐데.. 검소한 탓일까?

이탈리아 가정에는 하나 이상은 꼭 갖고있을 에스프레소 머신 비알레띠(BIALETTI). 분리된 통을 조립하기 전, 아랫통에 물 붇고 중간의 깔때기같이 생긴 것에 원두가루 담고 윗뚜껑 통을 조립해 끓이면 추출된 에스프레소가 윗뚜껑 통에 모인다. 그대로 커피잔에 따라 마시면 그만. 좀 더 자세한 과정은 여길

주방을 나와 잠시 베란다로 나왔다.


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넓은 베란다. 빨래 말리기도 좋고 가깝게 꽃을 키우도 좋다.

건너편엔 넓은 운동장도 펼쳐져 있어 언제든 달려가 축구를 즐기면 된다.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어서 한가했는데 4시 반, 식사마치고 나와보니 동네 꼬마와 청년들이 군데군데 모여 열심히 놀고 있더라는. 이탈리아 축구의 저력이 싹트는 곳.

맞은 편 집의 이런 풍경도 편안함을 더해주고

식구들이 모여 텔레비전도 보고 얘기도 나누고 커피도 마시고 하는 공간. 영어론 리빙룸쯤 되겠다.  저쪽의 원탁 테이블에선 카드게임을 해도 좋겠고. 반질반질 윤이나는 거실 바닥을 보며 엘리는 "하여튼 깔끔한 양반들이셔!"라며 눙을 친다.

집안은 그 자체로 사는 사람들의 생활단면을 엿보는 것은 물론 그들의 양식도 짐작해볼 수 있다던가? 재산을 모으고 자식들을 출가시키는 과정은 힘들었겠지만 틈틈이 자신들만의 사색과 취미를 돌봐온 흔적을 집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분위기는 자식들과 그들의 자식들에게도 좋은 양식으로 전해진다. 삶의 질이란게 뭐 대단한 거겠나? 취미 하나라도 즐기고 잘 가꾸는 것이 그 사람은 물론 자식들의 정서도 풍부하게 만들테다. 때론 자식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기기도 하지만.. 가령 나치의 추억을 더듬거나 유독 바바리에 집착하는 아버지라든가.. ^^


낡은 카메라에 유난히 애착을 갖는 루치아노. 몇 대의 카메라를 더 보여줬고 비록 이탈리아 말로 설명해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능 하나하나를 보여가며 설명하는 정성이 젊은이의 열정 못지않다. 


벨이 울리고 손님이 도착했다. 쟌 루까, 올해 11살이고 엘리 오빠네 아들, 즉 조카 되겠다. 오늘 식사에 참석할 나머지 2명의 인사중 한 명이고 남은 한 명은 잔루까(GianLuca)의 6살 위 형인 알레산드로(Alessandro), 아직 학교에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통통한 몸집, 젖살이 덜 빠진 얼굴에 주근깨도 적당하니 귀여워 엘리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데 단지 귀여워서만은 아니고 얼굴이 고모인 엘리를 쏙 빼닮아 엘리자베따는 루까를 '엘리자베또'(Elisabetto)라고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이탈리아어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스페인어, 프랑스어와 함께 명사에 남성, 여성형이 존재해서 끝이 '아'로 끝나면 여성형이고 '오'로 끝나면 남성형이 된다. 따라서 '마리아, 파올라'는 여자 이름이고 '마리오, 파올로'는 남자 이름이 된다. 그래서 '엘리자베또'. 엘리자베또를 껴안고 있는 엘리자베따.


낯선 우리들 앞에서 꽤나 수줍어 하던 루까. 독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할아버지가 벽에 걸린 그림이 잔루까의 그림이라며 이왕이면 그것과 함께 찍으라고 한다. 그래서 찰칵.

할아버지와도 한 장.

식사시간. 이제 자리잡고 앉으면 된다. 이탈리아 북부의 가정식, 70년을 살아온 할머니의 손맛, 접시위에 올라올 맛난 음식은 과연 무엇일지.. 이건 다음에 ^^.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