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세종문화회관에서 와인을 마시며 보는 오페라가 열린다면 로마의 한인숙소에서 만난 세 명의 여성을 동시에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로마에 도착해 위축됐던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만으로도 힘을 얻을 수 있었는데 한동안 시끌벅적한 대화로 온기를 불어넣어 준 이들에게 먼저 감사를 전한다.
밀라노에 퍽 잘 어울릴 듯한 길고 건강한 검은 머리결을 지닌
"원래 미술을 전공했어요. 한국화요. 그러다 대학교 3학년 때 유럽에 배낭여행을 왔다가 런던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무대 디자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아직 뮤지컬이나 오페라를 본 적은 없지만 무대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굳이
"배우가 무대의 어디에 서야 하는지, 음악의 어떤 시점에서 배우가 유리잔을 집어야 하는지, 그러기 위해 몇 걸음을 걸어 와야 하고 그 위치에 테이블이 있어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설정해야 해요"
이탈리아 생활이 좋으면 이곳에 정착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아니요, 한국에 갈꺼에요"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한 번은 나폴리 여행을 갔다가 서둘러 밀라노로 돌아왔다는데 도무지 그곳 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단다. 앞으로 2년은 더 밀라노에서 공부할 계획이라는 그녀는 사진 좀 찍자는 제안에 수줍어 하며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가르침대로 테르미니 역 근처 한 피자집에 들어서자 주인장이 건네는 첫 마디가 '쌀베'다. 우리도 맞받아 '쌀베'하고 외친 뒤 피자를 주문했다. 그 즈음,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기차를 타고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밀라노로 되돌아 가고 있었다.
이해미
"신촌의 한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어요. 4년 동안 열심히 했지만 이곳 독일에 와서 1년을 공부해보니 그곳에서 배운게 하나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는 중이에요"
다소 단정적인 그녀의 표현에 '과연 그럴까?' 싶다가고 현재의 입시체제와 그야말로 '내팽게쳐진' 음악, 미술 등 대한민국 예술교육의 현주소를 떠올려보니 결코 과장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엔 미국에서 공부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렇게 1년을 고민하다가 독일로 왔죠. 1년을 공부해보니 이곳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래도 고전 음악의 중심지가 이곳이니 그 기운과 깊이가 달라요"
학교와 독일인 가정을 오가며 익힌 독일어는 이제 수준급이다. 그런 그녀는 독일어에 대해 재밌는 해석을 내놨는데, "독일어를 공부하면서 언어가 이렇게 정교하고 표현이나 의사전달에서 정확하게 작동한다는 점이 놀랍고 흥미로워요"라는 말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기도 했다. 특히 한국 학생들의 독일어 발음이 훌륭해 현지 교수들도 흥미로워 한다고 하니 이 점도 재밌다.
절대음감을 갖고 태어난 그녀는 잠깐이나마 부모님으로부터 법대 지망을 종용받기도 했으나 자신의 꿈을 찾아 이곳 독일에까지 오는데 일단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갈 길이 여전히 멀다고 한다.
"작곡은 남자들의 영역이었어요. 그런 인식이 여전히 강하게 지배되고 있는 이곳에서 여자가 성공을 이루기란 쉽지는 않죠. 하지만 최근 독일에서도 한국인 여성 작곡가의 활약이 대단하거든요"
김보미
김보미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조용히 향하는 그녀를 향해 외쳤다.
"와인 한 잔 하시죠"
즉답이 없었으나 얼마후 그녀가 식당으로 왔다.
"술 한잔 하시자고 했으면 그냥 인사나 하고 방으로 갔을 텐데 와인 한 잔 하시자는 말에 왔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곧 로마 방문과 여정에 대한 주제로 옮아갔는데 그녀 왈, "서울서 출발해 오늘 로마에 도착했고 내일 베로나로 출발해요. 그곳에서 와인 행사가 있어 좋은 포도주가 있으면 구매계약을 하고 다시 돌아가야 하거든요"
그리고 건네 받은 그녀의 명함에 찍혀 있는 건 '소물리에'다. 허걱.. 혹시 아까 테르미니역 수퍼에서 3유로(4천5백원)에 구입해 마시고 있는, 그리고 그녀에게 권한 이 술에 대해 괜히 앞서 아는 척 떠든건 없는지 후다닥 되새겨 봤지만 다행히 없는 것 같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 이탈리아에서 요리와 와인을 공부한 뒤 귀국해 지금은 서울과 제주도에 자기기반을 탄탄히 다진 소물리에다. 이제 겨우 이탈라아 파스타 주변을 기웃대며 접시에 묻은 소스나 찍어 맛보고 있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인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와인을 마셔보면 다 그 맛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나요?"
"물론이죠"
"와인, 그러니까 그 벌겋게 보이는 술이 전부 포도에서 나온건가요?"
"몇 가지 첨가물이 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론 그렇죠"
평소 읽던 한겨레의 요리 칼럼, 와인 칼럼, 심지어 이탈리아어 문법책의 저자까지도 대략 알고 지내는 그녀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나의 가물한 기억력의 한계를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전부 옮기지 않는다는 핑계와 대충 섞어 마무리한다. 단, 대화중에 힘주어 반복된 '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제주도예요'라는 그녀의 철썩같은 믿음은 그때도 흔쾌히 동의해 줬지만 휴일에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아 빵 하나, 계란 하나 살 수 없는 이곳 몰타에서 궐기하는 심정으로 다시금 동의하게 된다.
세 사람과의 인연은 어쩌면 우리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더욱 특별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서 길 가다 마주치면 누구든 먼저 아는 체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제 어디서건 강건하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