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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9 오스떼리아 일 구포 5


자, 오늘은 또 다른 근사한 식당 하나 만나보자. 오스떼리아 일 구포(Osteria Il Gufo), 우리말로 '올빼미 식당' 되겠다. '구포'가 올빼미. 우리집에서 무척 가까운 식당으로 메뜨로를 타러 가거나 광장에 다녀올 경우 항상 식당 앞을 지나게 된다. 오며가며 볼 때마다 뭔가 내공이 느껴지는 집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난 주 우리에게 달미꼬꼬를 추천했던 안드레아는 이 식당도 적극 추천했다. 구포는 저녁에만 문을 열고 금요일 저녁은 손님들로 북적인다. 그러나 어제 찾은 식당은 2시간에 이르는 식사 내내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었으니 어찌된 영문인지 원.. 그래도 뻬루자 사람들에게 저렴하면서 맛있는 식당으로 정평이 난 식당이니 괜한 걱정은 접기로 했다.

서점에서 요리책을 사들고 나오니 8시, 뱃속에서 허기가 으르렁 거린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언니가 친절하게 테이블로 안내한다. 식당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구석자리. 테이블 상판이 대리석이고 의자도 꽤나 무겁다. 의자 빼는데 그 무게 때문에 살짝 애먹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렇고

정면을 보니 저렇다.

벽에 걸린건 올빼미들. 소박하지만 식당 이름에 대한 애정이 내부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떤 식당(지역, 국가를 막론하고)들은 이름과는 전혀 관계 없는, 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안은 곳도 많은데 이곳은 다르다.

와인을 담아낸 술병에도 어김없이 올빼미가 등장.

메뉴는 그간 식당 앞을 오가며 봐뒀었지만 폰트가 아니라 실제 필기로 적어놔 읽는데 애를 먹어 가격만 파악하는 정도. 가격은 여느 평범한 식당과 크게 다르지 않고 안티파스토와 육류와 생선을 제공하는 세꼰도는 메뉴가 다양한 반면 프리모인 파스타는 종류가 다른 식당의 1/3 수준이라는 점이 심하게 아쉽다. 자리에 앉으니 메뉴판이 아니라 A4용지에 복사한 메뉴종이를 건네준다. 식당 앞 메뉴판에 걸려 있던 그 종이다. 유심히 훑어보지만 여전히 알쏭달쏭, 결국 주문한 것은 미리 염두에 뒀던 19유로짜리 코스요리. 달미꼬꼬보단 비싸지만 여전히 저렴한 가격이다. 많은 식당들이 코스 요리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만큼 구포의 내공이 이 모두에 들어있으리란 기대로 주문했다. 와인리스트는 반듯한 메뉴판으로 건넸으나 살짝 훑어보다가 곧 500ml 하우스와인(5유로)으로 주문. 와인보단 요리맛에 집중하는 식사 아닌가.


친절한 언니, 원래 코스에 없는 거라며 작은 접시에 담긴 샐러드를 가져다준다. 환대가 담긴 서비스 접시에 기분이 좋아진다. 볼잘 것 없는 작은 양이지만 맛 탐험에서 그건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배터지기 마련인 코스식사 아닌가? 뭐든 주기만 하면 우린 언제나 맛 볼 준비가 돼 있다.


모양새나 씹히는 식감이나 영락없이 보리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보리 맞다^^. 찐보리를 리코타치즈에 버무려 낸 일종의 샐러드. 비슷한걸 시에나에서도 맛봤으니 적어도 중부지방에선 보리를 된장이나 고추장이 아닌 올리브유와 치즈에 비벼 먹는다걸 알겠다. 간이 안돼 있어 맹숭맹숭한데 위에 얹어낸 녹색이 그 역을 대신한다. 녹색이 뭐냐고 힘겹게 물어보니 루꼴라와 잦을 갈아 소금 살짝 넣고 올리브유에 버무렸단다. 바질만 그렇게 먹나 싶었는데 루꼴라도 그러는걸 보니 녹색 채소라면 뭐든 저렇게 먹을 수 있겠다. 달콤한 식전주를 곁들였다면 심심하고 담백한 맛 때문에 궁합이 좋았을 메뉴.

안티파스토 등장. 접시가 운동장처럼 넓다. 캐스팅을 살펴볼까?


우선 훈제로 향을 입힌 쫀득한 생모짜렐라 두 덩이, 말린 토마토, 야생(추정) 루꼴라, 그리고 휀넬 씨를 살짝 뿌린 뒤 올리브유로 마무리. 그리고보니 접시 가장자리엔 파프리카 가루도 눈에 띈다. 간단하지만 정성이 느껴지는 접시, 새로운 만족감이 밀려온다.


이 접시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야생으로 추정되는 저 루꼴라. 수퍼에서 구입하는 루꼴라는 저렇게 넓고 빳빳한 잎이 아니다. 맨날 흐느적거리는 속성 재배 루꼴라만 먹다가 식당에 와서야 저런걸 맛보니 입맛이 한층 성숙해짐을 느낀다. ^^ 강한 향, 거친 맛. 한국에서도 저런 놈을 재배할 수만 있다면.. 쌀 알 같은 휀넬씨를 씹자 정신을 번쩍 들게 할 정도로 향이 강하다. 조화가 멋지다.


스파게티, 펜네, 푸실리, 링귀니, 페투치네, 마카로니.. 그럼 저 파스타의 이름은? 사전을 뒤져보니 '리가토니'란다. 비슷한 모양으로 '까넬리니'가 있는데 그건 줄무늬가 없으니 그럼 리가토니다. 복잡한 저것들을 '파스타'라는 단일 명사로 묶어내지 않았다면 얼마나 피곤했을까.. 아무튼 파스타가 나왔다. 움브리아의 깊은 골짜기 마을, 노르치아(Norcia)에서 잡은 멧돼지를 프로슈또로 만든 뒤 이를 다져서 올리브유에 볶고 거기에 리가토니를 버무려 낸 것으로 가정집 풍이란다. 돼지기름 향도 강하고 후추향도 강하다. 치즈가루로 부드러움을 얹어냈으니 맛은 적당히 타협선을 찾았다.


다소 뜻밖의 맛에 놀라면서도 남김없이 맛있게 먹긴 했지만 한국에선 외면받을 파스타. 이탈리아 여행온 한국인이 수백종의 파스타 가운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연찮게 이 파스타를 맛본다면 돼지기름 냄새에 놀라겠지 싶다.


깨끗이 비운 파스타 접시를 걷어간 웨이트리스 언니, 부지런히 세꼰도 접시를 날라오신다.


캐스팅이 다채롭다. 고기와 석쇠에 구워낸 빵, 햄, 감자, 그리고 올빼미 눈을 연상시키는 호박과 당근의 조합. 주방장의 장난끼로 치부했지만 이곳이 '올빼미'식당이 아니었다면 식당의 격을 한참 깎아먹었을 엉뚱한 가니쉬(곁들임 음식)였을테다.


고기부터 시작해볼까? 포크로 고정하고 나이프로 살며시 그어보니 오랫동안 푹 익혀서인지 살이 결대로 부드럽게 베어진다. 골고루 돌려가며 소스를 묻힌 뒤 한 입 쏙. 진한 고기맛, 맛있다. 메뉴에는 'Wild pork and Fennel(회향풀로 맛을 낸 멧돼지)'이라고 나와있지만 먹는 내내 '쇠고기가 아니고?'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쇠고기 맛이 났다. 속였나? 그건 아닐테고 주방장만의 비법? 소스는 고기와 뼈를 우린 육수에 레드와인, 토마토, 당근, 샐러리 등, 각종 채소를 넣고 오랫동안 푹 끓여 걸쭉하게 걸러낸 폰드소스로 추정. 그리고 보니 재작년인가? 회사일로 스위스를 다녀오는 길에 홍콩에서 갈아탄 대한항공이 기내식으로 제공했던 고기요리가 이 맛과 흡사했다. 이코노미 기내식이란게 별게 있겠냐만 그날 와인을 추가해가며 먹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진짜 좋은 고기, 좋은 부위라면 별 양념없이 불에 익혀먹는 것으로 훌륭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채소와 양념 등을 아낌없이 사용해서 맛은 내주는게 좋다. 깊고 진한 맛을 내주는 이런 요리는 그야말로 와인 도둑이다.


이미 고기가 있는 웬 햄? 허나 무슨 상관이랴? 맛만 좋은걸!


감자도 그냥 익혀낸 것만이 아니라 일일히 으깨서 모양까지 냈다. 저걸 뭐라고 부르는데 이름이 도무지 기억이 안난다. 아무튼 달미꼬꼬와 확연히 비교되는 맛, 비주얼, 정성이다. 6유로의 가격차 치곤 꽤 간격이 크다.


우리도 저런 근사한 벽을 가질 수 있을까? 흉내는 낼 수 있겠지. 바탕이 좋으면 뭘 걸어놓아도 멋지다.


이미 배는 빵빵하지만 디저트가 나왔다. 놀라운 구성, 쵸콜라또 젤라또, 생크림, 케잌, 감 셔벗이 한 접시고


다시 생크림, 케잌, 감자에 아몬드로 맛을 낸 푸딩이 또 한 접시. 시작부터 끝까지 한치 흐트러짐 없이 만족을 안겨준다.

젤라또도 맛있고

감 셔벗도 맛있고


감자+아몬드 푸딩도 맛있다. 허나 고칼로리의 부담감이 풍선처럼 부풀다가 마지막 디저트에서 결국 폭발하는 느낌. 단 맛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한국인은 과일로 마무리하는 것을 더 선호하지 않을까 싶다.


이걸로 끝이다 싶었는데 접시를 걷어간 언니가 다시 쟁반에 뭘 담아 온다. 소주잔 크기의 잔에 담아온 것은 '리모네쩰로'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레몬술이다. 레몬 자체로 술을 냈는지 그라빠에 같은 독주에 즙을 섞었는지 알 수 없으나 첫 맛은 달고 진한 레몬이고 뒷맛은 알콜의 화(火)기가 확 오르는 명백한 술. 최소 30도는 되지 싶다. 독주는 홀짝이는 것 보다 단숨에 들이키는 것이 제맛 아닌가? 처음에 살짝 맛만 본 뒤 단숨에 들이켰다. 어우.. 확 오른다. 이탈리아 식탁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까페(커피)겠지만 어떤 이들은 그라빠(Grappa)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라빠는 포도로 만드는 브랜디로 이탈리아의 꼬냑이라고 보면 된다. 40도의 이 독주를 커피를 마신 뒤 마지막 입가심으로 한 잔 들이키는게 진정 식사의 마무리라는 것. 리모네쩰로는 그 그라빠를 대신하는 의식이 아닐까 싶다.


테이블 차지 4유로가 붙을 줄 알았는데 식사값과 와인값, 추가로 마신 커피 값 뿐, 테이블 차지는 없단다. 오호.. 올빼미, 너 정말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파스타 라인업이 부족한게 아쉬움이지만 어느날 고기요리가 심하게 땡긴다면 주저없이 달려 올빼미 품에 안겨야겠다. 어제는 배가 터질 듯 해서 사온 요리책을 보기도 싫었는데 하루가 지난 지금, 벌써 그 맛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앞으로 최소 1번 이상은 다시 찾지 않을까 싶다. 근데 평일엔 왜 그렇게 손님이 없는거니? 

부지런히 음식을 날라주고 엉금엉금 거리는 우리 질문에 정성스레 답변해주던 웨이트리스 언니. 주문을 하며 우리가 먼저 '미안하다, 이탈리아어가 서툴다'라고 하니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그럼 너희는 한국말로 해라, 나는 이탈리아말로 하겠다'라는 재치를 발휘하며 긴장을 풀어줬던 세심한 언니.

Posted by dalgo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