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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03 작지만 즐거운 생활의 변화 8

12시 30분, 학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김없이 들르는 곳이 수퍼마켓이다. 딱히 사야할 것이 정해지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들르곤 하는데 그럴 경우 꼭 사게 되는 것을 물이다. 가끔 녹물이 나오기도 하는 이곳 수돗물 사정에서 생수는 쇼핑에서 필수적인 품목이다. (몰타는 바닷물을 담수화해 수돗물로 사용한다고 한다. 그 탓에 물값이 비싸다고..)
 
최대 5리터 용량의 물도 수퍼에서 판매하고 있고 우리는 주로 3리터 용량의 물을 사다 먹곤 하는데 문제는 이놈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라는 것. 더욱이 우리가 사는 집은 다소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그 운동량이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쇼핑에서 물 무게만 빠져도 좀 살 것 같은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차에 마침 이웃에 사는 한국인 학생이 전하길 "스콧 수퍼에서 6개들이 물 6팩을 사면 집까지 배달"해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도 지금 집 한 켠에 물을 쌓아놨다는 것.

얼씨구나 잘됐다 싶었다. 그리고 어제, 학원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스콧에 들러 배달 여부를 물으니 "일단 쇼핑부터 하라"고 계산원이 상냥히 이야기한다. (몇 개의 대형 수퍼마켓 가운데 강양과 김군은 '스콧'이 가장 친절한 수퍼라는데 흔쾌히 동의한다)

감자와 우유, 맥주 등 몇 가지를 쇼핑한 뒤 계산대로 돌아와 와 직원에게 이것들에 더해 물 6팩을 추가로 해서 배달해달라고 하자 쇼핑카트로 물을 가져오라고 한다. 음.. 김군이 카트를 밀고 가 물을 실었다. 근데 싣다보니 최대 7팩이 실리길래 그냥 그 만큼을 계산대로 끌고 왔다. 무거운 물을 카트에서 내릴 순 없는 노릇, 계산원은 힐끗 물을 살피더니 애초 우리가 밝힌 의향대로 6팩으로 계산을 마치고 말았다.

때마침 김군도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어서 그 순간의 오류를 짚어주지 못했다. 결국 모든 계산을 마치고 4시에서 5시 사이에 배달이 갈 꺼라고 말하는 계산원과 미소를 주고받으며 헤어진 뒤 집에 돌아오면서 강양이 뒤늦게 살핀 영수증에서 물 1팩이 덜 계산됐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찌할 것인가?.." 어쩌긴? 그냥 하나 더 실려 오면 고맙게 마시면 되는거지. 4시 20분, 초인종이 울리고 스콧 배달차에서 물을 내리는 직원을 보고 바로 뛰어 내려갔다. 물은 우리 예상대로 7팩이 도착해 있었다. 직원과 즐겁게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서둘러 집으로 물을 옮겼다.

그게 바로 아래 사진에 있는 놈들이다. 이것들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어찌나 뿌듯한지.. 



>> 하나 삐쭉 솟아 있는 문제의 San Michel.

그리고 하나 더. 옥상에는 파라솔 의자가 2개 있다. 사하라에서 불어온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 쓸쓸히 방치되어 있던 녀석 가운데 가장 쓸만한 놈 하나를 강양이 쓰겠다며 지난 주 일요일 끌고 내려왔다. 물걸레로 정성들여 닦아내니 본래의 하얀 살을 드러낸다.

이놈을 거실쪽 발코니에 가져다 놨다. 자주 안나가게 되던 발코니였는데 녀석이 그 자리에 있으니 발코니를 찾는 횟수가 늘어났다. 강양은 거기에 앉아 멀리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쐬며 영어책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마침 그 자리는 북향이어서 한낮에는 시원한 그늘이 만들어지는데 옷소매를 지나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바람은 여간 상쾌한게 아니다.

이러다 문득 한국의 소식을 떠올려 볼 때면 괜히 빙그레 웃음이 지어진다. 흐흐흐.. 촛불을 같이 못들어 주는 건 좀 미안하지만 그래도 멀리서 작은나마 후원도 하면서 마음의 짐은 덜고 있다.

압력솥처럼, 곧 터져버릴 듯한 머리를 시원하게 식히고 싶은 이들이여, 승전의 소식을 안고 오는 그대들을 위해 시칠리아를 고스란히 담아낸 와인과 몰타의 싱싱한 무화과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겠소. 이곳의 푸른 바다와 뜨거운 햇살, 그리고 시원한 바람은 모두 그대들의 것이리니..



>> 점심을 먹고 나면 잠시 진이 빠지는데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찾아오는 낮잠의 유혹은 실로 엄청나다. 꿀맛같은 낮잠을 피하거나 견뎌야 할 이유가 여기선 없으니 BBC라디오 드라마를 켜놓은 채 양껏 챙겨먹는다. 낮잠은 역시 소파가 최고다.

Posted by dalgonaa